[마음의 향기] 중도를 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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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4-11-17 09:51 조회5,830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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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 마가다의 왕사성 근처에 있는 영취산(靈鷲山)에 계실 때였습니다. 그때 근처의 묘지 부근에서 소나(Sona)라는 비구가 열심히 수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소나는 원래 부잣집 아들로서 얼마나 호강을 했는지 발을 땅에 디디지 않아 발바닥에 털이 났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습니다. 언젠가 빔비사라 왕이 촌장회의를 열면서 소나도 거기에 따라가게 되었던 모양입니다. 이렇게 모인 김에 모두들 부처님이 계신 영취산에 가서 설법을 듣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의견이 모아져서 다들 그리로 갔습니다. 거기에서 부처님으로부터 설법을 듣고 법안을 얻은 자들이 많았는데 이때 소나도 감동해서 출가를 원했다고 합니다.
소나는 출가를 허락받은 이후, 영취산 근처의 공동묘지가 있는 곳에서 매우 열심히 수행했습니다. 선정을 하다가 경행을 할 때는 부드러운 발의 피부가 벗겨져서 피가 낭자하게 흘러도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열심히 수행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해도 깨달음이 얻어지지 않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열심히 수행해왔다.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에서도 나만큼 열심히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런데도 집착을 떠나서 번뇌를 해탈할 수 없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집에 돌아가서 재가신자로 남아 있는 것이 좋겠다. 집에 가면 재산이 많이 있으니 그것을 누리며 보시도 많이 하고 재가신자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을 불교에서는 퇴전(退轉)이라고 합니다. 처음의 생각을 버리고 뒤로 물러서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부처님께서는 소나의 이런 마음을 아시고 소나에게 가서 보니 주위에 핏자국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까닭을 물으시고 소나에게 질문을 하셨습니다.
“소나야, 그대는 집에 있을 때에 거문고를 잘 탔다고 하는데 정말 그러한가?”
소나가 대답했습니다. “예, 그러하옵니다.”
“그러면 소나여, 그대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거문고 줄이 너무 팽팽하면 좋은 소리가 나지 않을 것이다.”
“예, 그러하옵니다.”
“그러면 줄을 너무 느슨하게 해도 좋은 소리가 나지 않을 것이다.”
“예, 그러하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좋은 소리를 낼 수 있는가?”
“그것은 지나치게 팽팽해도 안 되고 지나치게 느슨해도 안됩니다. 알맞게 줄을 조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좋은 소리를 낼 수 없습니다.”
부처님과 소나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고 간 다음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소나야, 불도의 수행도 그와 마찬가지이다. 고행이 지나치면 마음이 격하게 되어 고요해 질 수 없으며 지나치게 풀어져도 게으름에 빠진다. 소나야, 수행에서도 그대는 중도를 취해야만 한다.”
이렇게 부처님께서는 거문고 줄의 비유를 들어 소나에게 훈계를 하셨습니다. 거문고 줄이 너무 팽팽하거나 느슨하면 소리가 잘 나지 않듯이 수행도 지나치게 엄격하거나 너무 나태하면 올바른 수행이 되지 않는 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해서 소나는 거문고 줄의 비유를 잘 명심하고 수행해서 마침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이러한 부처님의 말씀을 잘 되새겨보면 수행이라는 것은 몸과 마음을 항상 적절한 상태로 유지한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심하게 학대해야만 뭔가 깨달음에 이르지 않는가 하는 그릇된 생각에 빠져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6년 동안 수행하시면서 그러한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몸소 체험하시고 녹야원의 다섯 비구들에게 그것을 가장 먼저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소나에게도 이처럼 중도의 마음가짐으로 수행에 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중도라는 것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중간한 것이 아닙니다. 물리적 거리로서의 절반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중도는 결코 어정쩡한 태도를 지니는 것도 결코 아닙니다. 중도라는 것은 가장 적절하고 가장 잘 된 것을 의미합니다. 밥으로 말하면 너무 질지도 되지도 않은 밥이라고나 할까요. 그렇기 때문에 중도라는 것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중간한 것이 아니라 양 쪽을 다 고려하는 가장 합리적인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떠한 것에도 치우치지 않고 모든 요소를 고려하여 가장 적절한 것을 취하는 것이기 때문에 중도의 실천은 어려운 것입니다.
수행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용맹정진 한답시고 추운데 앉아서 버티다가 병만 얻어 고생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부처님께서 분명히 몸과 마음을 가장 적절한 상태에 놓아야 깨달음에 쉽게 이른다고 말씀하셨는데도 말을 안 듣습니다. 그렇게 남들이 경탄할만한 어려운 고행을 하고 나면 사실은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뭔가 깨달았다는 착각에 빠집니다. 이게 더 무서운 것입니다. 나는 당신들이 못해 본 고행을 했다는 아상(我相)이 알게 모르게 붙어서 성격만 고집불통이 됩니다. 대화를 해도 전혀 합리적인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도 고행이 지나치면 마음이 격해진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몸의 상태가 가혹한 환경에 놓이면 밝은 지혜가 떠오를 수가 없습니다. 불교의 수행이라는 것이 특공대 훈련 받는 것도 아니고 극기 훈련 하는 것도 아닌 바에야 몸을 학대한다고 해서 밝은 지혜가 떠오르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수행은 몸과 마음을 항상 적절한 상태에 놓고 자기의 마음을 잘 관찰하는 것입니다. 욕심이 일어나면 ‘나에게 욕심이 일어나는구나’, 게으름이 일어나면 ‘나에게 게으름이 일어나는구나’, ‘어, 화가 치미네, 잠재워야지’ 하는 식으로 늘 자기의 마음을 살펴서 그것을 제어하는 것이 불교 수행의 핵심입니다. 토굴에 몇 년을 들어앉아 있거나 참선한다고 엉덩이 짓무르도록 앉아 있어봐야 자기 마음 하나 다스리지 못하면 다 소용없는 것입니다. 잘못된 고행으로 아상과 오만, 독선만 강해질 따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선을 하든 일상생활에 임하든 항상 마음을 고요히 하여 스스로를 제어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참된 지혜가 일어납니다. 몸과 마음이 안온한 가운데에서 수행을 해야 지혜도 일어나고 사람을 대하는데 있어 진정한 자비심이 고요히 흘러나올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고행을 무조건 비난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인간이란 것이 서 있으면 앉고 싶어 하고 앉으면 눕고 싶어 합니다. 한 번 게을러지면 점점 더 게으름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 것을 막기 위하여 적절한 고행으로 자신의 해이해지는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바람직합니다. 그러나 너무 극심한 고행으로 몸이 상하는 것은 물론 성격까지 이상해지는 경우는 피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대로 수행을 하려면 중도의 입장에서 몸과 마음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어 밝은 지혜가 우러나오도록 해야 합니다.
-이 글은 중앙교육원 교육원장 화령 정사 (정심사 주교)의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