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향기] 기쁨을 음식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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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1-22 10:17 조회6,23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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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 마가다의 판차사라라는 마을에 잠시 머무르시면서 탁발을 나가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날 아침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가사를 단정하게 걸치시고 발우를 들고 탁발을 하기 위해 마을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마침 그 마을의 축제일이었습니다. 젊은 남녀들이 서로 선물을 교환하는 그런 축제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축제에 정신이 팔려 부처님께 공양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경전에 보면 부처님께서는 ‘깨끗이 씻어두었던 발우를 그대로 가지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말하자면, 그 날은 탁발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굶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출가승들은 하루 한 끼가 원칙이며 정오가 지나면 식사를 하지 않기 때문에 아침에 탁발을 하지 못하면 다음날 아침까지 굶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빈 발우를 들고 원래 계시던 곳으로 돌아오시게 되었습니다.


그 때 악마인 마라가 부처님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이렇게 말을 걸었습니다. 경전에서 마라라는 것은 부처님께서 마음의 갈등을 느끼실 때 번뇌의 상징으로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 마라가 말을 걸었던 것입니다.
  “사문이여, 먹을 것을 얻었습니까?”
  “마라여, 얻을 수가 없었다네.”
  “그렇다면 다시 한번 마을로 돌아가 보시오. 이번에는 음식을 얻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의연하게 마라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설사 얻은 바 없다 해도, 보라, 나는 즐기면서 산다. 마치 저 광음천(光音天)과 같이 나는 기쁨을 음식삼아 살아간다.



  광음천이라는 것은 바라문교의 신들 중의 하나인데 기쁨을 음식 삼아 살며 말할 때는 입에서 밝은 빛이 나온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이 해탈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신다는 말씀입니다. 부처님께서 탁발을 하지 못하고 돌아오시다가 순간적으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을 지도 모릅니다. ‘마을에 다시 들어가 볼까? 지금쯤은 어쩌면 축제가 끝나 누군가가 음식을 공양할 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을 마라를 등장시켜 나타낸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의연하게 그런 생각을 떨쳐버리셨습니다. ‘밥 한끼 먹지 않아도 나는 해탈의 기쁨으로 살아간다.’고 하시면서 거처로 돌아오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점이 부처님과 우리가 다른 점입니다. 우리는 한 끼만 늦게 먹어도 참지를 못하고 아우성입니다. 특히 수행자들이 식사 시간 좀 늦는다고 역정을 내고 하는 것을 보면 모양새가 별로 좋지 않습니다. 배고픈 상황이 닥쳤을 때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수행자와 범부의 차이가 보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부처가 되면 배고픈 것도 없고 몸에 어떠한 고통도 느끼지 않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도 우리와 똑 같이 배고픔을 느끼시고 덥고 추운 것도 느끼시며 몸이 아픈 것도 느끼십니다. 그리고 지금의 경우처럼 마음의 갈등도 느끼십니다. 그러나 그 다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배고프고 몸이 아플 때 우리 범부들이 보여주는 태도와 부처님께서 보여주시는 태도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조금만 배가 고파도 못 참고 안달입니다. 그리고 식사를 늦게 준비해 주는 사람을 원망도 합니다. 그리고 배가 채워질 때까지 오직 그 생각뿐입니다. 밥시간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거기에 대한 집착이 점점 더 커집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나는 기쁨을 음식 삼아 살아간다고 하시면서 의연하게 대처하십니다. 부처님께서는 거처에 돌아가셔서 밥 생각은 벌써 떨쳐버리시고 선정에 들어 계셨을 것입니다.



  언젠가 부처님께서 당신은 첫 번째 화살에는 맞아도 두 번째 화살에는 맞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몸으로 느끼는 모든 것을 부처님께서도 느끼시되 거기에 대한 마음가짐은 우리들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배 고프고 춥고 덥고 가렵고 아픈 것 등을 부처님도 우리들과 똑 같이 느끼십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한 반응은 우리와는 확연히 다릅니다. 아마 모기가 우리를 물면 우리는 순간적으로 탁 때려서 잡게 될 것입니다. 모기가 부처님을 물면 부처님도 가려우실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모기가 물어도 가려운 것은 느끼시되 우리와 같은 그런 반응은 보이지 않으실 것입니다. 누가 나에게 욕을 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누가 나에게 욕을 하면 금방 반응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미워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때려주던지 욕설이라도 해주고 싶습니다. 이것이 보통 중생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마음은 다릅니다. 그런 욕설을 마음에 두시지 않습니다. 그저 자비로운 마음으로 어떻게 하면 저런 어리석은 중생의 죄업을 면하게 해 줄까를 생각하십니다. 이것이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부처가 된다고 해서 이 세상이 바뀌겠습니까? 석가모니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셔도 죄짓는 사람은 여전히 죄를 짓고 있으며 나쁜 짓하는 사람은 여전히 나쁜 짓 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출현하셨다고 이 세상이 졸지에 극락세계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부처가 된 자신의 내면세계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달리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도 윤회를 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죽어야만 그 세계에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순간순간 우리의 마음이 어떤 작용을 하는가에 따라서 지옥도 되고 극락도 되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분노에 차서 누군가를 죽이도록 미워하고 있으면 그 순간이 아수라의 세계입니다. 내가 병상에 누워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으면 그게 바로 지옥입니다. 자기가 낳은 아기를 사랑스러워서 품에 안고 젖을 먹이고 있는 그 순간은 자기가 관세음보살이 된 것입니다. 행복에 겨워 어쩔 줄 모를 때 그 때가 곧 극락입니다. 순간순간 우리의 마음가짐이 이 세계를 결정합니다.
 


우리가 깨닫는다는 것은 우리의 내면의 세계가 변하는 것이지 깨달았다고 해서 우리의 몸이 총칼도 뚫지 못하는 금강불괴의 몸이 된다든가 이 세상에 악한 사람이 갑자기 다 사라지고 극락정토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내면세계가 바뀌어 바깥의 현상에 대해 어떤 마음가짐으로 그것을 바라보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깨달음에 의하여 지혜와 자비가 충만해졌을 때 지금까지의 세상이 나에게 다르게 해석되어지는 것입니다. 불교 공부를 하면서 항상 이런 것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부처님께서 탁발을 하지 못하고 돌아오시면서 기쁨을 음식삼아 살아간다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화두(話頭) 삼아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글은 중앙교육원 교육원장 화령 정사 (정심사 주교)의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