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향기]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 정도라 하는가?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4-12-01 16:00 조회6,259회

본문

불교의 모든 목적은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도(正道)라고 합니다. 다른 종교는 일시적 최면이나 마취는 가능하게 할지 모르지만 궁극적으로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그 길을 찾아내고 실천하셨으며 그것을 우리에게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늘 말씀하시기를 당신은 진리의 창안자가 아니라 단지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발견했고 그 길을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데 불과하다고 하셨습니다.


언젠가 부처님께서 사위성의 동원정사라는 데에 계실 때에 목갈라나라는 수학자가 찾아왔습니다. 그 사람은 부처님께 이렇게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이 정사를 방문하기 위해서는 지나와야 할 길이 있습니다. 또한 제가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수학에도 순서에 따라 가르치고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당신의 가르침에도 역시 순서에 따라 배우는 길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벗이여, 나의 가르침에도 물론 순서에 따라 배워야 할 길이 있소. 예를 들면, 조련사가 말을 쉽게 다루려면 우선 머리를 바르게 하도록 조련하고 여러 가지 훈련을 시키는 것처럼 나도 마땅히 가르쳐야 할 사람을 만나면 순서대로 가르쳐서 점차로 더할 나위 없는 안온의 경지에 이르게 하오.”


부처님께서도 가르침의 순서가 있으며 그 가르침대로 하면 열반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비구들이 실천해야 할 여러 가지 것에 대하여 순서대로 자세하게 설명하셨습니다. 그러자 수학자 목갈라나가 다시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세존이시여, 그와 같은 지도를 받은 당신의 제자들은 모두 다 무상안온의 경지에 이르게 됩니까? 아니면 이르지 못하는 자도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벗이여, 나의 제자 중에도 거기에 이르지 못하는 자도 있소.”
목갈라나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세존이시여, 분명히 열반의 경지가 있고 거기에 이르는 길도 있으며 부처님이라는 훌륭한 스승도 계시는데 어떤 이유로 거기에 이르는 자도 있고 거기에 이르지 못하는 자도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벗이여, 예를 들면, 여기에 어떤 사람이 있어 당신에게 왕사성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고 합시다. 당신은 그를 위해 상세하게 길을 가르쳐 줄 것이오. 그래서 그 사람은 무사히 왕사성에 도착할 수가 있었소.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길을 잘못 들어 엉뚱한 곳으로 갈 수도 있소. 왜 그랬다고 생각하시오?”
그러자 목갈라나가 대답했습니다.
“세존이시여, 나는 단지 길을 가르쳐 줄뿐이지 그 이상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목갈라나의 말을 듣고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벗이여, 그와 같소. 열반의 경지는 분명히 존재하고 그 곳에 이를 수 있는 길도 분명히 존재하오. 그리고 내가 스승으로서 그 길을 가르쳐 주고 있소. 그러나 제자들 중에는 그 경지에 이르는 자도 있고 이르지 못하는 자도 있소. 난들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있겠소. 나는 다만 길을 가르쳐주는 사람일뿐이오.”


수학자 목갈라나는 바보가 아니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미를 잘 이해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잘 이해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이르는 길을 발견하셨고 그것을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스승일 뿐입니다.  열반의 경지에 이르는 것은 오직 우리의 노력에 달려 있습니다. 부처님은 전지전능한 구제자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가지신 것은 오직 옷 한 벌과 탁발을 위한 발우 하나뿐이었습니다. 집 한간 지니지 않으시고 탁발에 의지하여 길에서 설법을 하시다가 길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야말로 도사인 것입니다. 그런 분한테 엎드려서 복달라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는 단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듣고 배우고 실천해서 괴로움을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그러한 열반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 주시는 스승이십니다. 이렇게 보면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 모든 것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불교의 모든 체계는 오직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길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발견하고 그것을 몸소 실천하여 증득하시고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불교의 원리는 이것이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외의 어떠한 논의나 논쟁은 모두 무의미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주가 끝이 있다든가 없다든가 죽어서 어떻게 된다든가 영혼과 육체가 다른 것인가 같은 것인가 등등의 형이상학적인 것에 대해서는 하등 얘기할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바로 이 순간 어떻게 하면 우리가 괴로움이라는 것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벗어날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거기에만 초점을 맞추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사상은 이처럼 현실적이고 실질적이며 모든 희론을 거부하는 실제의 우리 삶과 직결되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단지 우리의 괴로움의 근원을 생각하다 보니 결국은 인간이라는 것을 탐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몸과 마음의 구성 원리를 알고 분석해 나가다가 보면 결국 우리는 무명이라는 것에 의해서 모든 괴로움이 시작된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무명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혜는 우리의 탐진치가 제거되는 데에서 비로소 싹트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팔정도와 육바라밀이라는 실천방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와 같이 지극히 체계적이고 합리적이며 논리가 정연한 것입니다.


-이 글은 중앙교육원 교육원장 화령 정사 (정심사 주교)의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