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향기] 바른 실천은 바른 앎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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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4-10-10 09:48 조회6,47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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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다른 종교에 비해서 불교도들은 자기가 불자라는 것을 잘 내세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력서에도 종교란에 불교라고 쓰지 않고 무교라고 쓰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연예인들 중에도 불자가 더러 있지만 자기가 불자인 것을 내색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이렇게 된 까닭은 우리나라에 기독교 인구가 늘다보니 불자인 것을 내세우면 불이익이 많이 돌아오기 때문이랍니다. 불교는 다른 종교에 대해 그다지 배타적이지 않은데 일부 기독교는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으면 그렇게 못살게 군답니다. 어릴 때부터 절에 다니던 제 조카딸만 해도 거의 2000대 1의 경쟁을 뚫고 좋은 회사에 취직을 했는데 바로 위의 상사가 기독교도라서 얼마나 시달렸는지 모릅니다. 불자라는 것을 밝혔는데도 일요일에 교회에 나가자고 그렇게 다그쳤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어렵게 들어간 직장을 그만둘 수는 없고 제가 옆에서 어떻게든 흔들리지 말고 격려는 했습니다만 저도 그와 비슷한 경험을 했던 터라 그 괴로운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았습니다.


이웃 종교들이 자기들의 교세를 늘리기 위하여 극성을 떠는 것을 보면 우리 불교도들은 너무 한심합니다. 불교를 알리기 위해 노력하기는 커녕 오히려 불자라는 것을 숨겨야 하는 처지가 되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다른 종교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자기도 이해하지 못하는 이치에 맞지도 않는 말들을 앵무새처럼 배운 대로 떠들면서 열심히 포교합니다. 조금이라도 불교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간단한 몇 가지 질문만 해보아도 그들의 교리가 얼마나 허구인가를 쉽게 지적할 수 있는데도 우리 불자들은 대꾸도 못하고 심지어는 솔깃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신을 믿는 종교라고 해서 종교의 긍정적인 면을 무조건 무시할 수만은 없습니다. 인간의 동물적인 근성을 신의 권위를 빌어 어느 정도까지 순화할 수 있는 긍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나약한 면이 있어 무엇인가 큰 힘에 기대려고 하기 때문에 신을 믿음으로써 일상생활에서 위안도 얻고 자신감도 가질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신 중심의 종교도 초보적인 선악관을 심어주는 데에는 나름대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종교는 그저 그만큼의 차원에 머무를 뿐입니다. 궁극적인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몰두하다 보면 부정적인 면이 나타납니다. 자기들의 신을 위하여서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신앙 행위가 남에게 피해가 되는 줄은 모르고 그것이 자기들의 신에 충성하며 교리에 충실하다고 확신하고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언젠가 신문에서 본 것이 기억나는데, 아마 브라질 어느 오지였던 것 같습니다. 밀림 속의 그 마을은 전부 나체로 생활하는데도 부락민들이 아무 말썽 없이 자신들의 질서에 따라 평화롭게 살고 있었습니다. 농사도 짓고 가끔 짐승들도 잡아먹고 욕심 없이 서로 도우며 살면서 나체로 살아도 성범죄도 일어나지 않고 이웃과 전쟁도 하지 않는 평화로운 마을이었습니다. 그런 곳에 가서는 그들에게 옷을 나눠주고 글을 가르치면서 자기들의 신을 믿으라고 선교했다고 자랑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마을 사람들이 그 이후에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옷을 입음으로써 탐욕이 생기고 좋고 나쁜 분별이 생겼습니다. 신을 빙자하여 쓸데없는 죄의식을 심어줌으로써 남미의 평화로운 어느 오지 마을을 오염시켜 놓은 거지요. 배워야 할 사람들은 오히려 선교하러 들어갔던 그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것들이 다 잘못된 종교의 폐단입니다. 말하자면 지혜가 없이 무조건 믿다보니 그런 사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가 아닌 길은 아무리 열심히 가 봐야 본질에서 더욱 멀어질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진리를 추구하는 지혜를 그토록 중시하는 것입니다. 서구에서 이제는 거의 폐기 처분된 종교를 받아들여 이렇게 열광적으로 믿는 우리 민족들을 보면 참 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면에서는 같은 불자로서 더욱 책임감을 느낍니다.


우리 불자들도 이제는 공부해야 합니다. 그저 불상 앞에서 내 소원만 비는 것으로 불자를 자처한다면 다른 종교의 신자들과 뭐가 차이가 있겠습니까? 불교의 진리를 바르게 알고 거기에 따른 실천 방도를 제대로 파악하여 실천할 때에 불교는 우리에게 참으로 도움이 됩니다. 이런 복잡다단하고 변화가 극심한 현대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불교는 훌륭한 뗏목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도 나 혼자만 올라타고 간신히 생명을 부지하는 그런 뗏목이 아니라 누구든지 태워서 안전한 곳으로 내려다 줄 커다란 배가 바로 불교입니다. 지혜를 지니고 평화를 추구하며 인생이라는 괴로움의 바다를 안전하게 건너갈 방도를 알려 주는 것이 불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방법을 나 혼자만 알고 있어서도 안 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많이 알려서 같이 건너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내가 뭘 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의 길잡이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제 우리 불자들도 감정으로만 불교를 신봉하는 불자가 아니라 이지적으로 사색하는 불자가 됩시다. 우리 불자들은 흔히 실천, 실천하면서 실천이라는 말을 참 즐겨 씁니다. 하지만 실천도 뭘 제대로 알고 실천을 해야 제대로 된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즉 불교의 근본 원리를 알아야 실천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중국의 우화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마차를 몰면서 서울 가는 길을 묻기에 가르쳐 줬더니 반대방향으로 가더랍니다. 그래서 길을 가르쳐 준 사람이 그리로 가면 안 된다고 했더니 길을 물은 사람이 대답하기를, “내가 끄는 말을 보시오. 말도 네 마리인데 튼튼하고 내가 타는 수레도 이렇게 좋은 것이오. 서울은 금방 도착할 수 있소.”하면서 반대방향으로 더욱 열심히 채찍질하면서 달려가더랍니다. 그 사람은 아마 열심히 가면 갈수록 서울과는 멀어질 것입니다.


근본 원리를 모르고 수행하는 사람도 그렇습니다. 방향을 제대로 잡지 않으면 아무리 열심히 불교를 공부하고 실천한다고 하여도 제 자리에서 맴돌거나 반대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몇 십 년 수행을 했다고 하는 선사들 중에도 옆에 가기가 무서울 정도로 찬바람이 쌩쌩 나는 스님이 있는가 하면, 학승을 자처하면서 천지 운행도수가 어쩌고 하면서 황당한 소리를 하는 그런 스님들도 봤습니다. 다 불교의 기본 원리를 모르고 마구 앞만 보고 달려갔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스님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대보살이란 사람들 중에도 아상이 가득 차서 스님을 하인 부리듯 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불상 앞에서 108배 절을 하고 나서면서 신발 찾다가 화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방생을 하면서 자리다툼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실천, 실천 하지만 불교의 근본 원리를 모르고서 하는 실천은 도리어 악업만 쌓을 수도 있습니다. 그밖에도 불교 공부는 너무 열심히 하는데 생각하는 방식이고 행동은 허무주의로 흐르는 사람도 있고, 불교학자 중에도 공부의 방향을 잘못 잡아 회의에 빠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불교의 기초를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책을 통하든 선지식을 통하든 불교도가 되기 이전에 불교에 대해 바르게 아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공부하고 생각하는 불자가 됩시다. 그래서 어리석음에 빠진 많은 이웃들을 행복의 길로 이끌어 줄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큰 복을 짓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글은 중앙교육원 교육원장 화령 정사 (정심사 주교)의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