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향기] 사성제와 팔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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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6-15 09:32 조회6,014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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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공부의 가장 기본은 사성제를 잘 이해하는 것입니다. 사성제(四聖諦)는 사제(四諦), 사진제(四眞諦) 등으로 일컬어지며, 고성제(苦聖諦)?고집성제(苦集聖諦)?고멸성제(苦滅聖諦)?고멸도성제(苦滅道聖諦)의 넷을 가리킵니다. 이 네 가지 가운데에서 “성”이라는 말을 생략하여 고제(苦諦)?집제(集諦)?멸제(滅諦)?도제(道諦)라고 하기도 하며, 단순히 고ㆍ집ㆍ멸ㆍ도라고도 합니다. 사성제에서의 제(諦)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 satya의 의역으로서, ‘진리’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이론적이라기보다 실천적인 진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satya는 또한 진리 가운데에서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를 뜻하기 때문에, 사성제라고 하면 네 가지 변하지 않는 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잡아함경》 가운데의 <전법륜경>에 서는 사성제에 대해서 이렇게 설하고 있습니다.
비구들이여, 태어남도 고이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도 고이다.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고이고[원증회고(怨憎會苦)],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도 고이며[애별리고(愛別離苦)],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이 고[구부득고(求不得苦)]이다. 요컨대 취착(取着)하는 이 몸 자체가 고이다[오취온고(五取蘊苦)].
이것이 고에 관한 신성한 진리[고성제]이다.
또 비구들이여, 윤회하여 다시 태어나게 하고 쾌락과 탐욕을 수반하며 모든 것에 집착하는 갈애(渴愛)는 고가 일어나는 원인에 관한 신성한 진리[고집성제]이다.
또 비구들이여, 갈애를 남김없이 떠나고 멸하여 무집착인 것은 고의 멸에 관한 신성한 진리[고멸성제]이다.
또 비구들이여,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정정(正定)이라고 하는 이 여덟 가지의 신성한 도[팔지성도(八支聖道)]야말로 고의 멸에 이르게 하는 도에 관한 신성한 진리[고멸도성제]이다.
사성제라는 것은 한 마디로 괴로움의 실상과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이 없어졌을 때의 상태, 그리고 이러한 상태에 도달하는 과정을 설한 것입니다. 즉, 괴로움을 바로 알고 그 원인을 제거하여 열반에 이르는 것이 불교의 목표인데 그 방법이 바로 팔정도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팔정도는 사성제 가운데의 도제에 관한 세부적 실천 사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성제에서 도제는 열반에 이르는 실천방법을 설한 것이고 그것이 팔정도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이 팔정도를 완전히 실천하게 되면 열반에 들어 아라한이 됩니다. 즉 완전한 깨달음을 얻어 성불하게 되는 것이지요.
사성제의 도제는 중도의 실천에 의해서 완성될 수 있습니다. 팔정도는 이러한 중도의 실천을 여덟 가지로 나누어 구체적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팔정도의 각 항목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즉, 팔정도는 중도라는 하나의 수행방법을 여덟 가지 측면에서 실천하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팔정도의 각각의 실천 덕목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서로를 보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팔정도의 각 항목에 대한 경중을 따질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가장 처음에 나오는 정견과 마지막의 정정이 특히 중요시해야 할 덕목이라고 생각됩니다. 정견을 가진다는 것은 다른 모든 실천 덕목의 전제조건이 되는 것이고, 또 정정은 불교의 궁극적 목적에 해당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보통 불교의 실천을 계(戒)?정(定)?혜(慧)의 세 가지 방면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삼학(三學)이라고 하는데, 즉, 언행을 바르게 가지는 계에서 바른 마음가짐인 정이 나오고 여기에서 지혜가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삼학의 차원에서 팔정도를 계?정?혜에 대비해 보면, 정견과 정사유는 혜에 해당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어와 정업, 정명은 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념과 정정은 정에 해당하며, 정정진은 계?정?혜 모두에 공통되는 실천덕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팔정도는 이와 같이 불교 실천의 근간이 되는 계?정?혜 모두에 해당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팔정도는 불교 실천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성제에 삼전십이행상(三轉十二行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녹야원에서 처음으로 다섯 비구에게 사성제를 설하시고 나서 이 사성제의 각각에 대해서 시전(示轉), 권전(勸轉), 증전(證轉)의 삼단계로 실천할 것을 설하셨습니다.
우선 고성제에 대한 삼전을 보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고제는 이러한 것이다라고 하는 아직 들어본 적이 없는 가르침에 대하여 나에게 눈이 생기고, 지가 생기고, 혜가 생기고, 명이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고제란 이러이러한 것이다.’라고 하는 고제의 내용을 나타내 보인 것이기 때문에 시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권전이라고 하는 것은 ‘고제를 완전하게 알아야 한다.’라고 하는 것으로, 이것에 의하여 “나에게 눈이 생기고, 지가 생기고, 혜가 생기고, 명이 생기고, 깨달음이 생겼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고제에 대하여 완전하게 알아야 한다는 것을 권하는 것이기 때문에 권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증전이라고 하는 것은 ‘고제가 이러이러한 것임을 완전하게 알았다’는 것인데, 이것은 고제에 대한 깨달음을 증득했다는 것으로 증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집성제에 대한 삼전도 마찬가지 형식입니다. 즉, 시전은 ‘집제란 이런 것이다.’라고 하는 내용을 나타내 보인 것이 시전입니다. 집제는 끊어야 하는 것이라고 권하는 것이 권전입니다. 이것은 집제의 시전에서 나타난 갈애 등의 번뇌를 끊을 것을 권하는 것입니다. 증전은 집제를 끊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멸성제의 삼전에서 시전은 ‘멸제란 어떤 것인가라?’는 것을 나타내 보인 것입니다. ‘멸제는 현증(顯證)해야 한다.’고 권하는 것이 권전입니다. 현증한다는 것은 고의 멸을 실현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멸제에서 보여준 열반을 실현할 것을 권하는 것입니다. 즉,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권하는 것입니다. 증전은 멸제를 이미 현증했다, 증득했다는 것으로 깨달음을 얻고 열반을 증득했다는 뜻입니다.
도성제의 삼전에서 시전은 ‘이것이 도제이다.’라는 도제의 내용을 보이는 것입니다. 권전은 도제는 이렇게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권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팔정도를 반복하여 배우고 실천할 것을 권하는 것입니다. 증전은 도제를 닦고 익히는 것을 완성했다는 것입니다.
고성제뿐만 아니라 집?멸?도성제의 각 제에도 마찬가지 형식으로 시전, 권전, 증전이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모두 ‘나에게 눈이 생기고, 지가 생기고, 혜가 생기고, 명이 생기고, 깨달음이 생겼다.’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의 ‘눈이 생기고, 지가 생기고, 혜가 생기고, 명이 생기고, 깨달음이 생겼다’고 하는 안(眼), 지(知), 명(明), 각(覺)을 사행상(四行相)으로 하여, 삼전 각각에 이것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십이행상이라고 하는 설도 있습니다. 즉, 이것은 사제 각각에 십이행상이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사성제 각각에 삼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십이행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즉 사성제의 각각에 대하여 시전, 권전, 증전이 있기 때문에 합하면 열두 가지가 되는 데, 이것을 사성제의 ‘삼전십이행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혹은 이것을 ‘삼전십이행법륜(三轉十二行法輪)’이라고도 합니다.
이것을 요약하여 좀 더 쉽게 말씀드리면, 시전이라는 것은 한 마디로 ‘고?집?멸?도가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리고 권전이라는 것은 ‘고는 알아야 하고, 집은 끊어야 하며, 멸은 증득해야 하며, 도는 닦아야 한다.’는 것을 권하는 것입니다. 증전이라는 것은 고를 바로 알고, 집을 끊으며, 멸을 증득하고, 도를 완전히 닦는 것을 보여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깨닫도록 밝힌 것을 말합니다.
삼전은 사성제의 각각에 대해 아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실천하고 증득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면, 고제만 하더라도 시전에서는 ‘고가 이러한 것이다.’라는 것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고가 어떤 것이라는 것을 단순한 지식으로서만 지니는 것이 아니라 고는 반드시 끊어야 한다는 것을 권전을 통하여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실천을 통하여 고를 없애는 것이 증전입니다.
집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전을 통하여 고를 생기게 하는 원인을 아는 것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를 생기게 하는 원인을 실제로 없애도록 해야 하는 것이 권전입니다. 그리고 그 원인을 실제로 완전하게 없애는 것이 집제의 증전입니다.
이와 같이 멸제와 도제에 대해서도 삼전은 적용이 됩니다. 멸제와 도제가 어떤 것인지를 알았으면, 아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그것을 실천해야 하며, 그렇게 해서 실제로 증득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사제의 각각은 실천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며, 실천에 의하여 사제가 완성되는 것이며, 깨달음이 열리는 것입니다. 즉, 사성제의 각각에 대해 이러한 삼전으로서 불도를 완성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도 다섯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섯 비구들이여, 이 사제의 삼전십이행상을 진실 그대로 알지 못하면, 위없는 지혜를 얻고 등정각이 되지 못한다. 나는 이 삼전십이행상을 진실 그대로 알았기 때문에 위없는 지혜를 얻고 등정각(等正覺)이 될 수 있었다.
그렇습니다. 사성제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것을 실천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하며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성제는 하나의 이상으로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가 도달해야 할 목표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팔정도는 우리가 실천해야 할 구체적인 덕목을 드러낸 것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있어야 하고 거기에 따른 실천이 있어야 합니다.
- 이 글은 중앙교육원 교육원장 화령 정사 (정심사 주교)의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