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향기]신(信)?해(解)?행(行)?증(證)-바른 믿음과 이해를 통한 불교의 실천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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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8-03 13:19 조회5,14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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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다른 종교처럼 무조건 믿는 것이 아니라 뚜렷한 실천체계가 갖추어져 있다. 물론 다른 종교도 나름대로의 신행체계를 가지고 있겠지만 불교처럼 다양하고 합리적인 체계를 가진 종교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교는 그 출발에서부터 다른 종교와는 다른 차원에서 시작되었는데 그 까닭은 교조이신 석가모니 부처님 자신이 깨치신 진리의 보편타당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참된 진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그릇됨이 없어야 한다. 옛날에는 맞았는데 지금은 맞지 않는다거나 동양 사람들에게는 맞는 것이지만 서양사람에게는 적용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진리가 아닌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아시아권 위주의 불교가 기독교 일색이었던 서양 사회에 새롭게 각광받으며 세계적인 종교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 조금도 이상할 게 없다.


부처님께서는 법을 전하실 때에 항상 합리적이고 체계적이며 알아듣기 쉽게 말씀을 하셨다. 그러한 전통은 부파불교와 대승불교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어졌다. 그래서 불교의 교리는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 육바라밀 등과 같이 항상 가짓수를 나누어 일목요연한 체계 하에 설명된다. 이것을 법수(法數)라고 한다. 이 법수 가운데에 사만성불(四滿成佛)이라는 것이 있다.


사만성불은 불교의 대표적인 신행체계로서 흔히 신(信)?해(解)?행(行)?증(證)이라고 한다. 이것은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에서 처음으로 설해진 것인데 우리가 성불을 하는 데 있어서는 신?해?행?증의 네 가지가 원만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진리에 대한 믿음과 진리에 대한 바른 이해, 그리고 바른 이해를 통한 실천이 제대로 되어야만 바른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신(信)---미신과 맹신을 떠난 믿음

신?해?행?증의 사만성불에서 첫 번 째인 신(信)은 믿는 것을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양한 종교를 믿으며 살고 있다. 종교를 가지지 않는 사람이라도 나름대로의 신조를 믿으며 살고 있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징크스나 부적 같은 것을 믿기도 한다. 이러한 다양한 믿음 가운데에서 어떤 것을 과연 옳은 믿음, 바른 믿음이라고 할 것인가?
무조건 믿는 것을 맹신이라고 하고 잘못 믿는 것을 미신이라고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미신, 맹신에 빠져 자신을 망치는 것은 물론 주위의 사람들에게까지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많이 본다. 이러한 미신과 맹신 때문에 인류는 많은 불행을 겪었고 지금도 미신과 맹신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불행을 겪고 있으며 심지어는 온 인류의 미래를 어둡게 하기도 한다. 종교에 기인한 인종차별, 테러, 대량학살, 집단자살, 전통문화파괴 등이 대표적인 맹신의 예이다.
그러면 이러한 맹신이나 미신과 달리 불교에서의 믿음이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화엄경》에서는 “믿음은 도의 으뜸이 되고 공덕의 어머니가 된다.”고 하였다. 불도를 닦아 정각을 이루는 데에는 믿음이라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씀이다.
불교에서의 믿음은 삼보를 믿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에게 훌륭한 가르침을 전해 주신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 그리고 불법을 지키고 전하는 상가에의 귀의가 믿음의 시작이다. 그래서 누구나 불자가 되려면 먼저 삼귀의계를 받고 삼보에 대한 귀의를 맹세한다. 귀의라는 것은 신명을 바쳐 믿고 따르겠다는 의미이다. 모든 불교의식에서 삼귀의에 대한 게송을 가장 앞에 놓는 것도 믿음이 도의 시작이고 원천이며 으뜸이 되기 때문이다. 삼보에 대한 믿음은 한 마디로 불교의 진리에 대한 믿음이다. 그 가운데에서 연기와 공에 대한 믿음은 불자로서는 필수적이다. 이는 인과의 도리를 믿는 것으로서 이것을 부정하고 우연이나 어떤 절대자의 힘을 기대하는 것은 모두 삿된 믿음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해(解)---정견에 바탕을 둔 이해

사만성불의 두 번째는 해(解)이다. 해는 바른 이해라고 풀이할 수 있다. 우리가 진리라고 믿는 것도 바른 이해가 있어야 한다. 바른 이해가 없이 자기 생각대로 믿어버리면 그것이 바로 맹신이다. 부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무조건 믿으라고 하지 않으셨다. 전통이나 소문, 위대한 스승의 말씀이라거나 혹은 예전부터 내려오는 경전이라고 해서 무조건 믿으면 안된다고 하셨다. 심지어는 누군가가 부처님으로부터 들었다고 하더라도 곧바로 믿지 말고 진리에 비추어보아 맞는지 안맞는 지를 스스로 검증한 다음 믿으라고 하셨다. 말하자면 정견(正見)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불자로서의 정견은 한 마디로 사성제를 바르게 인식하는 것이다.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괴로움으로부터의 완전한 해탈이다. 정견을 지닌다는 것은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사성제의 이치를 바르게 인식하는 것이다. 불교의 모든 교리와 수행체계는 사성제를 근간으로 구성되어있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모든 것을 성불을 향한 사다리로 생각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불교를 이해한다면 잘못이 없을 것이다.
진리에 대한 믿음과 함께 진리에 대한 바른 이해가 따르지 않으면 그것을 실천하는 데에도 오류가 있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려는 노력이 따라야 한다. 바른 이해가 없이 무조건 믿는 것은 또 하나의 오류를 범하게 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자기의 견해에 집착하거나 무조건 믿는 것을 장님 코끼리 만지기에 비유하시면서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진리를 수호해야 할 사람이 ‘이것만이 진리이고 그 이외의 것은 거짓이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하시면서 아무리 진리라고 하여도 그것에 집착하면 또 하나의 미신이 된다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은 ‘무조건 믿으라’가 아니라 스스로 이해하고 검증한 다음 진리라고 확신하는 것만 믿되 거기에 집착해서 안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진리에 대한 바른 이해이고 태도이다. 해만성불(解滿成佛)이라는 것은 이러한 의미이다.



행(行)---팔정도와 육바라밀의 실천
사만성불의 세번 째는 행(行)이다. 행은 믿고 이해한 것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아무리 많이 알고 있더라도 실천이 없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 없다.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는 말처럼 실천이 따라야 깨달음의 길로 들어설 수가 있다. 불교에서의 행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은 팔정도와 육바라밀이라고 할 수 있다.
팔정도는 사성제 가운데의 도성제로서 성불에 이르기 위하여 반드시 실천해야 할 여덟 가지 방법을 말한다. 정견?정사?정어?정업?정명?정정진?정념?정정이라는 여덟 가지가 바로 이것인데 바른 견해를 가지고 바르게 생각하고 바른 말을 하며 바른 행위를 하고 바른 직업을 가지며 바른 정진을 하고 바른 도리를 잊지 않으며 마음을 늘 고요하게 가짐으로써 괴로움을 멸하는 것을 말한다. 이 팔정도는 출가와 재가를 막론하고 불자라면 반드시 걸어야 할 길이다.
팔정도가 각 개인의 내면의 충실에 기여하는 것이라면 육바라밀은 나와 관계하는 사람들의 배려, 즉 이타행에 좀 더 치중한 실천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의 대승불교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마련된 실천방법이 육바라밀이다.
바라밀(波羅蜜)은 산스크리트어 파라미타(p?ramit?) 의 음역으로서 ‘최고의 상태’ 혹은 ‘완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에 의지하면 괴로움이 많은 미혹의 이 언덕에서 모든 괴로움을 벗어버리는 깨달음의 저 언덕에 도달한다는 의미도 있다. 그래서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간다는 의미로 파라미타를 한문으로는 ‘도피안(度彼岸)’이라고 의역하기도 한다. 이 언덕이니 저 언덕이니 하는 것은 물론 상징적인 표현이다. 따라서 바라밀이라는 말은 저 언덕으로 건너간다는 의미도 되고 저 언덕으로 건너가기 위한 수단도 된다. 이러한 바라밀에 6 가지가 있다는 것이다.
육바라밀은 보시(布施)바라밀, 지계(持戒)바라밀, 인욕(忍辱)바라밀, 정진(精進)바라밀, 선정(禪定)바라밀, 그리고 지혜(智慧)바라밀을 말한다. 이 6가지 바라밀을 육행(六行)이라고도 한다. 팔정도가 내면의 수행을 중시하는 것에 반해 육행에서는 대상을 염두에 두고 실천하는 보시나 인욕이 강조되고 있다. 특히 보시에 대한 강조는 인간 본연의 이기심을 제거하고 이타행으로서 더불어 행복해야 한다는 사상이 저변에 있다. 그야말로 대승불교의 실천행이라고 할 수 있다.



증(證)---진리의 체득

사만성불의 마지막은 증만성불이다. 증(證)이라는 것은 진리를 증득한다, 체득한다는 의미이다. 경전에서는 ‘무분별적정법지(無分別寂靜法智)와 부사의승묘공덕(不思議勝妙功德)을 얻는 것’을 말한다고 했다. 한 마디로 최고의 지혜를 얻어 모든 괴로움을 벗어나는 열반의 경지가 바로 이것이다. 부처님의 진리의 가르침을 믿고 잘 이해하며 거기에 따라 실천하면 이러한 경지가 얻어지는 것이다.

이처럼 불자로서 어떻게 열반이라는 궁극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가를 체계적으로 내보인 것이 바로 신?해?행?증의 사만성불이다. 성불이니 열반이니 하면 많은 사람들은 나와는 별개의 아득한 경지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설해진 것이다. 우리가 믿는 만큼, 아는 만큼 실천하면 거기에 맞는 행복이 주어진다.
예를 들어,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술을 끊는 것이 여러 모로 좋다는 생각을 믿고 왜 술이 해독을 주는가를 바르게 이해한 다음 금주를 한다면 그 사람은 심신이 그만큼 편안해 질 수 있다. 혹은 도박에 중독된 사람이 도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좋다는 것에 확신을 가지고 도박이 어떤 해로움을 끼치는가를 바르게 이해한다면 그것을 끊게 될 것이다. 그런 다음 도박의 폐단으로부터 벗어났을 때 그 사람은 비로소 편안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처럼 신?해?행?증의 단계를 거창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사소한 것에서부터 실천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신?해?행?증이다.
바른 행위에 대한 공덕을 믿고 바른 행위의 내용과 결과에 대한 철저한 이해를 거쳐 거기에 맞게 실천하면 그 공덕은 저절로 얻어지게 된다. 이처럼 신?해?행?증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의 사소한 것의 이해와 실천으로부터 높은 경지의 득오에 이르기까지 두루 적용할 수 있는 실천체계이다.

-이 글은 중앙교육원 교육원장 화령 정사 (정심사 주교)의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