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향기] 불교는 자비와 평화의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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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7-30 10:14 조회5,35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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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는 지혜를 추구하는 종교이지만 지혜와 함께 불교의 특징으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이 자비입니다. 지혜와 자비는 불교의 양 날개와 같아서 어느 것 하나도 따로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지혜와 자비는 불교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가장 잘 닦은 사람은 가장 자비로운 사람”이라고 하는 말도 있습니다.


  불교에서의 자비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사랑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사랑은 나와 남을 이미 분별한 상태에서 베푸는 것이지만, 불교의 자비는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나와 한 몸이라고 생각하고 자비를 베푼다는 ‘무연대자, 동체대비(無緣大慈, 同體大悲)’라는 말이 보여주듯이, 나와 인연이 있든 없든 모든 중생을 한 몸으로 생각하고 한없는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꼭 내 가족이라서 혹은 나와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이라서 사랑을 베푼다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중생에게 차별 없이 무한한 사랑을 베푸는 것이 자비입니다.


  원래 자비라는 말에는 ‘발고여락(拔苦與樂)’의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고통 받는 중생을 위해서 그 고통을 덜어주고 즐거움을 누리게 해 준다는 말입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말을 내세우면서, 원수까지 사랑하는 자기들의 종교야말로 가장 자비로운 종교가 아니냐고 자랑합니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원수를 사랑하는 예는 지극히 드뭅니다. 그리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는 이 말 자체에 벌써 원수와 나라는 구분이 지어져 있습니다. 원수가 나에게 잘못을 저질렀지만 자비로운 내가 아량을 베풀어 원수를 사랑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수는 사랑하되, 나와 원수가 결코 같은 입장이 되지는 못합니다. 나는 나고 원수는 원수라는 구분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미워하는 원수이지만 사랑이 넉넉한 내가 사랑을 좀 나누어주겠다는 의미가 강합니다.


 그러나 불교의 자비에는 원수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사랑할 원수가 아예 없습니다. 모든 중생을 나와 한 몸으로 보기 때문에 자비를 베푸는 것은 당연합니다. 분별에 의한 사랑이 아니라, 나와 한 몸이라는 생각에서 자비행을 펼칩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수를 사랑하라고 해 놓고는 자신의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원수로 여기고 타도의 대상으로 삼는 부류들과는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릅니다. 이들이 원수를 사랑하는 경우는 그 원수가 자기들의 신을 믿게 되거나 자기들의 교리에 복종하는 경우뿐일 것입니다.


  이 세계에는 무수히 많은 종교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그 가르침이 널리 퍼진 것은 불교 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세계를 대표하는 3대 종교 가운데에서 기독교와 이슬람교만 하더라도 자기들의 종교를 확산시키기 위하여 무력을 사용한 경우가 매우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기독교의 십자군 전쟁이나 이슬람교도들의 불교사원의 파괴, 그리고 근대의 선교사를 앞세운 서구열강의 침탈 같은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십자군 전쟁은 11세기 후반부터 13세기 후반까지 약 200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그 사이에 유럽백성들이 당한 약탈과 방화, 그리고 무자비한 살상 등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끔찍했습니다. 종교의 이름을 빙자한 만행이었던 것입니다. 종교를 위하여 무기를 들고 살상을 저지른다는 것은 불교도로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아직도 끝이 나지 않고 있는 중동 지역의 전쟁도 현대판 십자군 전쟁이라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중동이나 서아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분쟁도 종교에 기인한 것이 많습니다. 종교 간의 충돌도 있지만 같은 종교 안에서도 교파가 다르다는 이유로 끔찍한 살육을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또 19세기 말 서구 열강들이 아시아와 남미, 아프리카 등 여러 나라를 침략하여 식민지를 건설할 때, 선교사들은 총칼의 힘에 의지하여 기독교의 확산에 열을 올렸습니다.


  이슬람교의 “코란이 아니면 칼을 받으라.” 라는 말도 무력을 사용하여 자기들의 종교를 확산시킨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특히 8세기부터 인도에 침략하여 수많은 불교유적을 파괴하고 승려들을 학살하여 13세기에는 인도에서 불교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만들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과격 이슬람교도인 탈레반 정권에 의해서 아프가니스탄의 마미얀 대불이 파괴되어 양식 있는 세계인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던 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모두 이러한 종교적 만행의 연장선상에 있는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극도로 경계하는 파괴와 살상이 종교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은 불교의 자비 정신을 더욱 필요로 합니다.


  물론, 이런 행위를 하는 종교인들은 일부의 과격한 부류라고 할 수 있지만, 어쨌든 자비가 극도로 결여된 행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들의 종교를 확산시키기 위하여 다른 종교의 유적을 무참히 파괴하고 이교도들을 학살하는 행위는 도저히 종교라고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들이 자기들 간의 종교적 이념 분쟁에 의하여 피를 흘린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중동을 비롯한 세계 각처에서는 종교 간의 견해 차이로 끔찍한 학살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지금도 온 세계가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평화를 지향하는 종교가 도리어 평화를 해치는 원인으로서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종교는 차별 없는 사랑을 전 인류에게 베풀도록 이끄는 것이어야 합니다. 특정한 신에게 선택받은 어떤 민족이나 종족, 혹은 어떤 지역만이 은총을 입는다는 편협한 생각을 버리지 않는 한은 지구상의 종교분쟁은 끝이 없을 것입니다. 나와 남을 차별하지 않는 무한한 사랑을 통하여 평화를 실천하지 않는 종교는 참된 종교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불교는 미래 사회의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세계가 한 지붕이라는 말처럼 이제 전 세계는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중동의 한 지역에서 분쟁이 일어나면 그 영향이 온 세계에 미치기도 하고 어느 한 나라에 흉년이 들거나 원자력 발전소의 사고가 일어나면 온 세계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추이를 지켜보기도 합니다. 그만큼 세계는 가까워졌으며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무차별적인 자비의 정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너와 남을 구분하고 내가 너 보다 더 낫기 때문에 혹은 정신적으로 우월하기 때문에 사랑을 베푼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모든 중생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 되어 있고 서로 의지하여 살아가는 세상이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랑이 불교의 자비입니다. 불교에서 ‘무연대자, 동체대비(無緣大慈, 同體大悲)’라고 하는 것은 연기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바로 이러한 분별없는 사랑의 극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글은 중앙교육원 교육원장 화령 정사 (정심사 주교)의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