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향기] 정업2 (正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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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6-29 11:28 조회6,099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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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몸으로 짓는 업 가운데에서 살생 다음으로 경계해야 할 것이 투도입니다.
투도는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도 살생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재산이 소중하면 남의 재산도 소중한 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의 재산을 훔치거나 손해를 입히는 것은 악업이 되는 것입니다.
요즘은 경제수준이 좀 나아져서 좀도둑들이 현금이나 귀금속 등을 훔쳐가는 경우는 있어도 일반 사람들이 직접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경우는 잘 없습니다. 그러나 꼭 물건을 훔치는 것만이 도둑질은 아닙니다. 사기를 쳐서 남의 재산을 빼앗고 나라의 세금을 축내는 것 등이 다 도둑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재물을 취득하는 것이 아니면 다 도둑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위공직자가 지위를 이용하여 부를 축적한다든가, 거두어야 할 세금을 뇌물을 받아먹고 눈감아 준다거나, 자연보호를 위해 허가를 내어주어서는 안 되는 곳에 뇌물을 받아먹고 건축허가나 개발허가를 내어주는 것 등이 다 도둑질하는 것입니다. 국가의 재산을 관리하고 운용하는 데에 있어서도 자신의 이익을 취하여 부당하게 비싼 값으로 사들여 나라 살림을 축내는 것도 도둑질이고, 터무니없이 비싸게 물건 값을 받는 것도 사실은 도둑질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현대사회의 투도행위를 들자면 아마 끝이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 정업입니다.
도둑질을 하지 않는 것 뿐 아니라 정업도 더욱 적극적으로 실천하여 어려운 사람을 위하여 보시를 행하고 공공의 재산이나 기물을 아끼며, 사회 전체를 부유하게 만드는 것이 참된 정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투도라는 것은 바른 견해와 바른 생각이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탐욕입니다. 그래서 《니건자경》에서는 탐욕에 대해 이렇게 설하고 있습니다.
탐욕 있는 사람은 많이 쌓아두고도 싫증을 낼 줄 모르므로 무명의 뒤바뀐 마음으로 항상 남을 침해하고 손해를 끼칠 생각을 지녀 현세에서 원한과 미움이 많고 몸을 버리고는 악도에 떨어지는 것이니 이런 까닭에 지혜로운 사람은 마땅히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탐욕이 있으면 남의 것을 항상 탐내게 되는데 이것은 무명으로 인해 그런 것입니다. 무명으로 인한 잘못된 견해와 잘못된 생각에 남의 것을 탐내는 것이고, 또 그로 인해 남의 것을 훔치고 빼앗으려고 하며, 그 결과 사람들의 미움과 원한을 사게 되어 악취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로운 사람은 만족할 줄 아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다음으로 사음을 떠난 것을 바른 행위라고 한다고 했는데, 사음이란 바르지 못한 성관계를 가지는 것을 말합니다. 성욕이라는 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이것은 식욕, 수면욕과 더불어 우리의 숙명적인 3대본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 자체가 성욕의 산물로 태어났기 때문에 성욕의 굴레를 벗어난다는 것은 인과의 이치로 보아도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더구나 생물은 종족번식본능이 있기 때문에 자기의 개체를 끊임없이 확대하고 번식하려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인간은 시도 때도 없이 이러한 본능을 발산시키려고 합니다. 짐승들은 교미 때가 되면 일 년에 한두 번 교미하는 것으로 그치지만 인간이라는 고등동물은 자아에 대한 집착이 특히 강하기 때문에 자기의 개체를 번식시키려는 본능 또한 강해서 교미시기가 제한이 없습니다. 이것도 앞에서 말씀드린 유애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자기의 개체를 유지 존속시키려는 욕구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여러 가지 사회적 제약이 있기 때문에 자기의 욕구대로 교미를 실행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성욕은 식욕이나 수면욕과는 달리 혼자서 해소하지 못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성욕이라는 것은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항상 상대가 있어야 합니다. 상대방과의 교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성적인 관계는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물론 강간이나 매춘 등의 특수한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관계에서는 상대방의 동의가 있어야 이루어지는 것이 성관계입니다. 그래서 성욕의 해소에는 대상과 또 그 대상자의 동의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욕해소의 대상자를 선택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어느 한 사람을 두고 많은 사람의 경쟁자가 있을 수도 있고 또 자기는 좋다고 해도 상대방이 동의를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대상을 선택하는 과정에서의 경쟁 때문에 싸움이 일어날 수도 있고 또 상대방이 성관계에 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폭력이나 권위에 의한 강제적 방법이 동원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방치되면 짝짓기 과정에서 많은 혼란이 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결혼이라는 형식을 통하여 공인된 짝짓기를 하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해 놓으면 짝짓기도 비교적 수월할 뿐만 아니라 짝짓기를 하느라 시간을 소비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없게 되어 생산이나 경제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게 되어 안정된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또한 결혼이라는 형식을 통하여 상대에 대한 소유를 공인 받을 수 있고 다른 사람의 소유에 대해서도 함부로 넘보지 못할 것입니다. 인간들이 다툼을 피하고 안정된 사회생활을 하고자 하는 데서 이런 지혜가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결혼이라는 이 굴레를 벗어나서 행해지는 변칙적인 짝짓기를 사음이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출가자의 경우에는 일체의 성행위나 음란한 행위가 금지되지만 재가자들에게 있어서는 성행위도 하나의 생활이기 때문에 완전한 금지가 어렵습니다. 문제는 사음이라는 변칙적인 성행위인데, 이것은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영향을 인간사회에 끼치기 때문에 특히 금지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재가자라 할지라도 성적인 것에 너무 집착하게 되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리고 성에 대한 것은 상호관련 하에 성립되는 행위이고, 더구나 결혼이라는 사회적 제도를 일탈한 사음은 거기에 관련된 사람들 사이의 소유개념과 질투에 의하여 심각한 장애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입니다.
《분별선악소기경》이나 기타의 경전에서 사음을 경계한 이유를 종합해보면, 첫째는 사음을 즐김으로써 정신이 흐트러지고 진리를 가까이 할 생각을 내지 못하기 때문에 근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적인 것에 너무 집착하면 아무래도 자기가 하는 일에 소홀해지기 마련입니다. 모든 사건의 배후에는 돈과 이성문제가 관련되어 있다고 하듯이 성적인 것에 집착함으로써 중요한 일을 망친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역사상으로 보아도 성적인 방종으로 인해 국가의 대사를 망친 경우가 허다하고 주위를 둘러보아도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성적인 유혹으로 인해 부정을 저지르거나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도 많습니다. 물불을 가리지 않고 사음에 집착하기 때문에 바른 정신을 가지고 사태를 바르게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신과 타인을 망쳐버리기 때문에 특히 사음을 경계하라고 한 것입니다.
또 하나는 사음을 행함으로써 관계된 사람들의 질투심을 유발하고 그에 따른 보복이 두려우므로 항상 불안한 상태에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음은 두 사람의 마음이 맞아야 한다는 특수성이 있으나 여기에 수반하는 관련자들의 질투라든가 사회적 제재가 있기 때문에 늘 그런 것에 대해서 염려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심하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영위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에 사음은 권장할 만한 것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음은 재산의 손실을 가져오고 주위의 신뢰를 잃어버리게 된다고 했습니다. 사음에 집착하게 되면 서로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많은 돈을 써야 하는 경우가 많고 그것 때문에 부정을 저지르거나 신용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음의 이러한 폐단을 보면 사음은 먼저 자신의 내면세계에 대해 악영향을 미칠 수 있고, 다음으로는 대사회적인 면에서의 악영향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음을 바른 행위라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음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생각하여 이성의 인격을 존중하고 정조를 존중해 줌으로써 건전한 가정과 사회를 이루고 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정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르지 않는 행위는 이 밖에도 무수히 많이 있지만 살생, 투도, 사음을 떠난 것을 정업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의 생명을 다치지 않게 하고 남의 재산을 아끼며 남의 인격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대표적으로 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살생, 투도, 사음을 떠난 것을 세속의 바른 행위라고 한다면, 세속을 떠난 지혜로운 자의 바른 행위는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번뇌와 집착이 없고 괴로움을 바르게 다하여 괴로움의 소멸로 향하게 하는 세속을 벗어난 지혜로운 자의 바른 행위란 어떤 것인가?
이른바 불제자가 고성제를 있는 그대로 사유하고,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를 있는 그대로 사유하여, 바르지 않는 생활을 버리고, 몸의 세 가지 악행과 몸의 나머지 악행들을 생각하여 그것들을 여의고, 번뇌를 없애 집착하지 않는 것으로, 그러한 태도를 지니고 범하지 않으며, 때를 어기지 않고 한계를 넘지 않는 것을 지혜로운 자의 바른 행위라 한다.
세속을 떠난 지혜로운 자의 정업도 마찬가지로 우선은 사성제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진리에 대한 정견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견은 팔정도의 나머지 덕목들에 대해서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조건이므로 정견이 갖추어지지 않고는 어떠한 생각이나 행위도 바른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정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성제의 진리를 바르게 사유하지 않고서는 바른 행위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자의 바른 행위의 조건으로서 사성제를 바르게 알고 사유할 것을 첫 번째 조건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지혜로운 자의 바른 행위는 살생, 투도, 사음의 세 가지 악행을 떠남은 물론 나머지 악행들도 여의어 번뇌를 없애고 집착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때를 어기지 않고 한계를 넘지 않는다고 한 것은 바른 행위를 하는 데는 시간과 장소에 적절하게 행동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바른 말을 하고 바른 행동을 하는 데에는 시기를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해야 할 때에 하지 않고 행동해야 할 때에 하지 않는 것은 때로는 비겁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또 그 장소에서 합당한 행위를 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약한 사람에게는 강하게 굴다가 강한 사람에게는 비굴하게 군다면 그것은 바른 행위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예절을 지키다가 없는 곳에서는 법도를 위반한다면 그것도 바른 행위라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른 행위라는 것은 중도의 입장에서 바르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무 지나치거나 과격한 행동들도 바른 행동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정업은 정어와 함께 바른 사유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잘못된 생각의 바탕 위에서는 잘못된 말과 잘못된 행위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바른 사유와 바른 말, 그리고 바른 행위는 우리의 신, 구, 의의 업을 바르게 하는 것으로서 미래의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수행을 계(戒)?정(定)?혜(慧)로 나누면, 정견과 정사유가 우리의 지혜를 밝히는 부분이 될 수 있고, 정어와 정업은 다음에 말씀드릴 정명과 함께 계율에 해당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중앙교육원 교육원장 화령 정사 (정심사 주교)의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