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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당정사 밀교경전 | 육자대명다라니(六字大明陀羅尼)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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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18-11-02 17:05 조회2,32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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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자대명다라니(六字大明陀羅尼)의 유래

 

육자대명다라니는 우리나라에서 뿐만 아니라 중국·티베트·몽고 등 아시아지역 내에서 가장 널리 신행되고 있는 대표적인 진언다라니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대승장엄보왕경은 육자대명다라니를 설하고 있는 경전이다. 부처님이 제개장보살의 육자대명다라니를 얻을 인연을 묻는 질문에 의해서 부처님 자신이 과거세에 육자대명다라니를 구하기 위하여 찾아다니시던 인연과 그 공덕을 설하는 내용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육자대명다라니를 얻은 인연에 대한 내용은 대승장엄보왕경의 제4권에서 설해져 있다. 먼저 부처님은 제개장보살에게 육자대명다라니를 얻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설하고 있다.

선남자여, 내가 과거세의 일을 생각하니, 이 육자대명다라니를 구하기 위하여 미진수와 같이 수많은 세계를 두루 다니고, 무수한 백 천만 구지 나유다의 여래를 공양하였으나, 내가 저 모든 여래가 계시는 곳에 가서도 얻지도 못하였고 듣지도 못하였느니라.

 

이와같이 설한 다음 제개장보살에게 육자대명다라니를 얻은 인연을 다음과 같이 설한다.

부처님께서 과거세에 육자대명다라니를 구하기 위하여 보상여래에게 갔으나 얻지를 못하고 다시 연화상여래 처소에 가서 육자대명다라니를 얻기를 간절히 원한다. 그러자 연화상여래께서는 육자대명다라니의 무량한 공덕을 설하시고, 관자재보살이 이러한 공덕의 육자대명다라니에 잘 머물러 있다고 설한다. 다시 연화상여래는 무량수여래께 이 다라니를 구하자, 무량수여래께서는 연화상여래에게 육자대명다라니를 줄 것을 관자재보살에게 요청한다. 이때에 관자재보살은 부처님께 만다라를 보지 못한 자는 이 법을 얻지 못한다며 작단법을 설하고 나서 연화상여래에게 옴마니반메훔의 육자대명다라니를 설한다. 연화상여래께서 관자재보살에게 공양을 올리고 관자재보살은 이것을 다시 무량수여래에게 올리니 무량수여래는 도로 연화상여래에게 바치었다. 그리하여 연화상여래께서는 이 육자대명다라니를 받고 나서 도로 연화세계로 돌아갔다. 그때 부처님께서 연화상여래처소에서 육자대명다라니를 들었음을 밝힌다.

육자대명다라니의 유래를 밝히는 다른 문헌으로 마니카붐(mani bkah hbum)이 있다. 이 경문은 티베트의 관음경이라 하며, 티베트의 제5대 송첸감포(Sron btsain sgam po)의 유훈을 모아서 기록한 티베트불교의 보전이다. 이 문헌은 티베트의 건국을 완성한 송첸감포왕이 저작자로 알려져 있으며, ‘마니카붐이란 말은 보석에 관한 모음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이 문헌은 육자진언에 관한 쏜첸감포왕의 전집이라고 한다. 내용은 관세음보살의 신앙에 관하여 설명하고 있으며, 이 전집내의 대승장엄보왕경등 관세음보살 신앙에 관한 글 속에 육자진언에 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이 문헌의 원형은 7세기 경에 성립하여 13세기까지 발전되어 15세기경에 완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23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는 700패엽의 문헌 전체가 발견된 것은 17세기 중엽의 일이다.

그리고 6세기 전에 성립된 돈황에서 발굴된 게송본의 대승장엄보왕경에는 육자대명다라니가 아닌 다른 진언(om bri bum pad ma pri ya)을 설하고 있으므로 육자대명다라니는 비교적 후기에 이 경전에 수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상의 유래에서 살펴보듯이 육자대명다라니의 성립 시기는 7세기 초의 마니카붐의 성립을 토대로 하여 차츰 10세기 말에대승장엄보왕경이 번역되면서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냈다고 추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