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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상정사 연명의료 | 경장에서 바라본 연명의료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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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18-10-04 16:12 조회1,97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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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장에서 바라본 연명의료결정

      

환자의 최선의 이익을 보장하고 자기결정을 존중하여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보호하는 연명의료결정, 이러한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사건들이 초기 경장에도 등장하고 있다.

雜阿含經(대정장 2, 346b-346c)박깔리의 경(Vakkalisutta)에 나오는 대목이다.

여기에서 세존과 박깔리여의 대화를 나누는 내용을 요약 하면, 박깔리 라는 비구가 중병에 걸러 도공의 집에서 함께 머물고 있었는데, 박깔리 비구가 머물고 있는 도공의 집으로 방문한 붓다에게 말하기를 계를 받은 뒤에 계율을 잘 지켜 실천하고 수행하는데 인간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즉 오온이 무상하고 스스로 욕되게 한 것이 없음과 괴롭고 실체가 없다는 가르침을 확인 후, 박깔리 비구는 수행하는 승들로 하여금 산 중턱의 위치하고 있는 검은 바위가 있는 곳으로 중병에 걸린 자신을 이송해 달라고 부탁하고 자신은 중병으로 인한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스스로 죽음으로써 생을 마감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경전에서는 중병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 또한 해탈이라고 부르고 있고, 붓다는 이것을 인정함으로써 박깔리 비구에게 허락하고 있다.

 

또 하나의 사례를 보면, 고디카(Godhika)비구의 경우이다. 고디카 비구는 이시길리 산비탈의 검은 바위에서 머물면서 방일하지 않고 근면하고 스스로를 독려하며 일시적으로 심해탈(心解脫)을 얻었지만, 곧 잃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여섯 번이나 해탈을 일시적으로 심해탈을 얻었으나 상실되고 말았다. 칠곱번째로 방일하지 않고 근면하고 스스로 독려하여 일시적인 심해탈을 얻게 되자 마음속으로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다. ‘여섯 번이나 일시적으로 심해탈을 하였으나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니 이제 해탈 할 수 없으니 죽으리라라고 생각 후 고디카 비구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였다. 붓다는 제자들을 데리고 고디카 비구가 행한 아시길리 산비탈의 검은 바위로 갔다. 그곳에서 붓다는 제자들에게 하늘을 가리키며 검은 연기가 동서남북상하 여러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도록 하였다.

고디카 비구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근본적인 이유는 여섯번씩이나 심해탈을 계속 유지하지 못하고 일시적이였기 때문이라고 경전은 밝히고 있다. 주석서에는 해탈심을 계속 유지할 수 없었던 이유는 질병으로 인한 육신의 고통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붓다는 고디카 비구의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 또한 완전한 열반의 성취라고 말하고 있다. 생사윤회를 벗어난 완전한 해탈한 사람의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죽음은 곧 완전한 열반의 성취로 결코 비난받을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고디카의 경우에서도 유추할 수 있다.

붓다의 가르침의 생사윤회를 벗어난 완전한 열반에 있다.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죽음은 종교적으로 얼마나 성숙했는지에 따라 죽음에 대해 비난받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고통에 심한 환자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기 전에 먼저 자신과 자신의 노력만이 자기에게 주어진 고통과 괴로움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붓다는 팔정도에서 설하고 있다. 올바로 볼 줄 알아야 하고(正見). 그렇게 해야 올바로 생각할 수 있으며(正思). 이 두 가지를 기본으로 하여 올바른 언어(正言)와 행위(正行, 正業)를 함으로써 올바른 생활(正命)을 하게 된다. 이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올바른 노력(正精進)과 올바른 마음가짐(正念) 그리고 올바른 정신(正定)이 필수적인 것이다. 이와 같이 팔정도를 실천할 수만 있다면 인간의 육체적인 고통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얻어 완전한 해탈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붓다의 기본적인 가르침으로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환자들에게 이러한 팔정도의 의미를 알려줌으로써 자기의 고통에서 조금이나마 벗을 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