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총지종

총지신문 연재글

불교총지종은 ‘불교의 생활화, 생활의 불교화’를 표방하고 자리이타의 대승불교 정신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생활불교 종단입니다.

기획연재 | 회당 조사와 만남, 한국현대밀교의 물꼬를 트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총지종 작성일20-02-05 13:13 조회23회

본문


회당 조사와 만남, 한국현대밀교의 물꼬를 트다. 

<현대한국밀교와 원정대성사> 


(상) 회당 조사와 만남, 한국현대밀교의 물꼬를 틀다.

(중) 한국밀교, 그 기나긴 겨울잠에서 깨어나다.

(하) 불꽃처럼 일어난 창종의 열망 그리고 불교총지종

 

총지종의 개조이며 현대한국밀교의 개척자인 원정대성사의 대비원(大悲院)은 밀교를 통한 구국도생(救國度生)의 방편으로 나타났으며, 이는 또한 한국밀교의 중흥의 길이었다. 원정 대성사의 탄신을 기념하고, 창종 50년을 되돌아보는 자리로서 본지는 대성사의 행장을 통해 한국현대밀교의 태동부터 불교총지종의 창종에 이르기까지, 불교총지종 법장원이 발간한 「밀교사상사 개론」의 내용을 발췌하여, 총 3회에 걸쳐 연재한다. - 편집자 주


1,600여 년 전의 불교전래와 함께 신라와 고려를 거치면서 민중을 구제하고 숱한 국난을 극복하며 번창하고 왕성했던 한국의 밀교! 그러나 조선조의 억불정책 속에서 밀교는 쇠퇴하고 통불교(通佛敎) 속에서 겨우 그 명맥만을 이어왔다. 이에 한국밀교의 중흥을 위하여 혜성과 같이 나타나신 분이 계셨으니, 그 분이 바로 정통밀교 총지종을 창종하신 원정대성사였다. 해방 이후 정신적 공황과 민생고(民生苦)에 허덕이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정법(正法)으로서 밀교의 가르침을 펼치신 원정대성사.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하고 민족을 실의와 좌절로부터 구하겠다는 원정대성사의 대비원(大悲院)은 밀교를 통한 구국도생(救國度生)의 방편으로 나타났으며, 이는 또한 한국밀교의 중흥의 길이었던 것이다.


중생구제의 대자비 서원을 세우다
해방 이후 한국의 현대밀교사를 돌아볼 때, 천재적 통찰력과 혜안을 지니셨던 원정대성사께서 해방과 6.25 한국전쟁 이후 어려웠던 당시 사회에서 정신적 치유와 자성참회를 주창했던 진각종 창종주 회당 대종사를 만난 것은 신생 한국밀교의 홍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원정대성사의 해박한 불교지식과 뛰어난 밀교수법(密敎修法)의 수행력과 가르침은 총지종과 진각종 뿐만 아니라 한국 밀교의 새로운 태동과 밀교중홍의 발판이 되었다. 불교국가 고려를 끝으로 사라져버린 밀교정법이 원정대성사의 오지신력(五智神力)으로 하나하나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한국의 현대밀교는 기나긴 잠을 깨고 태동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잊었던 밀교의 비법(秘法)과 경궤(經軌), 다라니(陀羅尼)와 수법(修法)등이 발굴되기 시작하면서 통불교 일색이었던 한국의 불교계에 밀교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되었다. 더구나 근현대사에 있어서 한반도에 ‘밀교’라는 말을 처음으로 전파했던 분이 바로 원정대성사인 바, 이에 대한 불교사적 평가는 새롭게 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총지종의 개조이며 현대한국밀교의 개척자인 원정대성사의 속성(俗性)은 일직(一直) 손씨(孫氏)로서, 휘(諱)는 대련(大鍊)이었으며 후일 총지종의 개산과 더불어 정우(禎佑)로 개명했다. 법호(法號)는 원정(苑淨).
1907년 1월 29일 경상북도 밀양군 산외면 다죽리에서 탄생한 원정대성사는 타고난 품성이 영특, 민첩하고 불요불굴(不撓不屈)의 의지와 정의감, 뛰어난 기지와 고매한 인격을 소유한 큰 그릇으로 일컬어졌다고 한다.
영남(嶺南)의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나 단아하고 고상한 품성을 물려받았으며, 한번 보고 들은 것은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는 놀라운 기억력과 천재성을 지녔던 원정대성사는 어린 나이에 이미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비롯한 유가(儒家)의 경전을 두루 익혔으며, 탁월한 문필력과 더불어 주역(周易)과 노장(老莊)에도 조예가 깊었다. 성사는 일찍이 개화의 물결을 타고 현대의 고등교육을 마치고는 잠시 관계(官界)와 교육계에 종사하였으나 20대에 불교에 뜻을 세운 후 한반도는 물론이고 만주·중국 등을 두루 다니며 불경의 수집과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러던 중 피비린내가 몰아치고 유혈이 낭자하던 비극의 6.25 한국전쟁을 만났다. 대성사는 동족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처절한 전쟁의 참혹함과 도탄(塗炭)에 빠진 중생들의 고통을 목격하고, 호국불교(護國佛敎)를 통해 나라를 구하고 중생을 구제해야겠다는 대자비(大慈悲)의 서원(誓願)을 세웠다.


불교종단 첫발, 심인(心印) 등 용어창안
이러한 큰 서원을 세우고 정진하던 중 원정대성사는 1950년 진각종(眞覺宗)의 종조(宗祖)인 회당(悔堂) 손규상(孫珪祥)조사를 성사(聖師)의 고향인 경남 밀양(密陽)에서 만나게 된다. 회당조사는 40대인 해방직후에 지병을 고치고자 애쓰던 중 우연한 기회에 관세음보살육자대명왕진언인 ‘옴마니반메훔’을 접하여 묘득을 얻고 1947년경부터 연고가 있는 경북지역에서 ‘참회원’이란 이름으로 교당을 열고 있었다. 이 당시에는 아직 ‘밀교’란 용어조차도 쓰이지 않았으며 밀교에 대한 교학적 개념도 없이 단지 육자진언염송의 공덕과 죄과를 참회하여 심신을 정화함으로써 병고를 해탈하겠다는 소박한 수준의 신흥교단이었다.
이때에 원정대성사와 회당조사의 해후는 실로 한국현대밀교의 물꼬를 트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회당조사가 참회원이란 이름으로 대중을 이끌고 있었지만 교리적으로도 빈약하였을 뿐만 아니라 종단의 정체성을 확립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러한 때에 불교에 조예가 깊고 학식과 덕망을 겸비한 원정대성사를 만난 것은 회당조사로서는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원정대성사에 의지하여 교리적 근거를 마련하고 종단의 체계를 마련하는 한편 회당조사는 사원 건설과 대중포섭에 매진했다. 현재 진각종에서 쓰고 있는 심인(心印)이나 심인당(心印堂), 심공(心空) 등의 용어가 원정대성사에 의하여 이때에 창안되었고, 이로 인해 참회원은 종단의 모습을 조금씩 갖춰가기 시작했다. 1951년에는 교당명을 ‘심인불교건국참회원(心印佛敎建國懺悔園)’으로 정했는데 심인과 불교라는 용어를 교당명에 처음으로 사용하면서 불교종단임을 표방하여 신흥종단에 대한 세간의 오해를 불식시키고 불교종단으로서의 첫발을 내딛게 되었던 것이다.


종단의 조직과 교리체계 마련에 전력 

이리하여 두 거성(巨星)은 손을 잡고 이후 10여 년 동안 의기투합하여 중생제도에 전념했다. 참회원 건설과 대중 접촉 등 외부적인 일은 회당조사가 주로 담당하고 원정대성사는 내부적으로 종단의 조직과 교리체계를 마련하는 데에 전력을 기울였다. 특히 원정대성사는 문장력이 뛰어나 4·4구의 정형조로 교리를 알기 쉽게 풀이하고 한문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하여 가능한 한 한글 위주로 모든 경전과 교리서를 작성했다. 진각종의 초창기에 원정대성사에 의하여 한글로 번역된 ‘이전에 내가 지은 모든 악업은…’으로 시작되는 참회게와 ‘원하건대 이 공덕이 널리 일체 미쳐져서…’로 시작되는 회향게는 명문 중의 명문으로서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총지종과 진각종의 양대 종단에서 법회에 사용되고 있다. 현재 진각종에서 사용하고 있는 『진각교전』은 주로 이 시기에 원정대성사에 의하여 엮어진 『법불교문』, 『응화방편문』 등이 기초가 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또한 원정대성사는 1958년 말에는 불교경전 가운데에서 요긴한 부분을 뽑아 한글로 번역하여 『응화성전(應化聖典)』이라는 이름으로 편찬해 내었으며 초심자들에게 불교의 윤곽을 파악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현재까지도 진각종에서는 『응화성전』을 주요 교전으로 삼고 공부하고 있는데, 후일 이 책은 더욱 보완되어 총지종에서 『불교총전(佛敎總典)』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특히 이 시기에는 농촌의 문맹자들을 위하여 교리를 한글로 풀이하고 붓글씨로 크게 써서 한 글자씩 짚어가며 따라 읽게 하여 문맹퇴치에 앞장섰는데, 이러한 활동은 진각종이 대중과 접촉하면서 교세를 확대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다음호에 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