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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드라마 | 1987년도 <토지> - 도덕의 틀을 깨고 원시적 인간을 보여준 ‘임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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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19-10-04 15:24 조회3,30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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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의 틀을 깨고 원시적 인간을 보여준 임이네

1987년도 <토지>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가 탤런트 박원숙씨가 나오는 토크쇼를 보게 됐습니다. 박원숙씨는 <토지>임이네라는 역할을 자신의 대표작으로 꼽더군요. 원작자인 박경리 선생님도 자신이 표현한 임이네에 대해 극찬했다면서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임이네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여자였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있으면 물불을 안 가리고 달려들었습니다. 남편 칠성이 있음에도 옆집 남자 용이에게 은근히 추파를 보냈습니다. 용이에게는 강청댁이라는 부인이 있고, 또 월선이라는 사랑하는 여자가 있기에 자신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자기 마음이 더 중요했습니다. 결국 용이의 첫아들 홍이를 낳음으로써 자신의 자리는 없을 것 같던 상황에서도 가장 견고한 자리를 만들어냈습니다.

나이 들면서는 용이에 대한 욕망과 집착은 돈에 대한 갈구로 모양을 바꾸었습니다. 자신의 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월선의 국밥집에서 일했는데 월선 몰래 돈을 빼돌려 이자놀이를 해서 베개에 숨겨두었는데 용정에 대화재가 나면서 자신이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돈이 소멸할 상황이 닥치자 그녀는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목숨까지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미친 듯이 베개를 찾던 모습은 그녀의 돈에 대한 집착을 보여주었습니다.

임이네가 이렇게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면서 살아가면서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녀는 양심의 가책 같은 건 느끼지 않고, 부끄러움도 없었습니다. 질긴 생명력을 가진 그야말로 잡초 같은 여자였습니다. 그녀의 질긴 집착과 생명력이 끔찍하면서도 놀라웠습니다.

박경리의 원작 <토지>는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 광복까지 최참판댁을 중심으로 해서 하동 평사리와 중국 용정을 중심으로 다양한 군상의 인물이 등장하는 대서사시입니다. 그러면서도 서희와 길상, 상현의 삼각관계, 용이와 월선의 순애보적 로맨스는 매우 절절했습니다. 역사를 아우르면서도 뛰어난 러브스토리가 있기에 이 소설은 드라마로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배우 한혜숙이 최서희로 나왔던 1979<토지>, 그리고 최수지가 최서희역을 맡았던 1987<토지>, 그리고 김현주가 서희로 나왔던 2004<토지> .

30여 년 전에는 임이네를 악역으로 생각했습니다. 기생충 같은 여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그녀야말로 최선을 다해 살아남은 우리 민중들의 모습이라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임이네와 비교되는 인물이 함안댁입니다. 둘 다 최참판댁 장남 최치수 살해사건에 연루돼 사형된 남편을 둔 여인들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딸린 불쌍한 여자들입니다. 그런데 둘은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남편이 살인죄로 죽음을 당하자 함안댁은 최참판댁에 자신의 처지가 부끄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아들 둘을 남겨두고 목을 매 어 죽었습니다.

반면 임이네는 남편 칠성이 살인에 가담했다가 사형당하면서 아이 셋과 함께 평사리서 쫓겨나야 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몸을 팔았지만 그녀는 결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불쾌하고 절박한 상황에서도 절망하기 보다는 솟아날 구멍을 찾았습니다. 그녀는 마침내 한 줄기 빛을 찾아냈습니다. 옆집 남자 용이입니다. 남편 칠성이 있을 때부터 잘생기고 점잖은 용이에게 늘 마음이 있었습니다. 용이가 자신에게 마음이 없고, 엄마가 반대하는 여자 월선에 대한 사랑으로 번민하는 것을 알지만 그녀에겐 그런 거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그녀가 관심 있는 건 용이의 아내가 돼서 평사리서 쫓겨나지 않을 방법을 찾는 거뿐이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목적을 이뤘습니다. 이렇게 그녀는 어떠한 어려움이 와도 결코 절망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남을 방법을 찾았고, 결국 그녀는 살아남았습니다.

임이네는 함안댁과도 달랐고, 월선이나 용이와도 결이 완전히 다른 종류의 사람이었습니다. 한때는 임이네를 악인으로 여겼는데 살만큼 살고 보니까 그녀는 악인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이기적이기는 했지만 그녀는 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산 것 뿐이었습니다. 평탄하고 기름진 땅에서 무난하게 살았다면 그녀는 굳이 그렇게 악다구니를 부리며 살지 않아도 됐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돌밭에서 살아남아야 했습니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토지>에는 무려 6백 여 명의 등장인물이 나옵니다. 최서희나 김길상처럼 주인공급의 캐릭터도 있는데 내게는 토지에서 임이네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그만큼 임이네는 낯설면서 신선한 캐릭터였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니, 도덕이니, 죄의식이니 하는 틀을 깨고 원시적 인간의 모습을 보여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