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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드라마 | <나의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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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19-07-01 20:15 조회1,83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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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과 공감, 그리고 위로에 관한 이야기

<나의 아저씨>

 

tvN에서 지난해 방송된 드라마 <나의 아저씨>(김원석 연출, 박해영 극본)는 유난히 안티가 많았던 드라마입니다. 그렇다면 이 드라마는 왜 이토록 강도 높은 비난을 받은 것일까요? 이는 방송 당시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당시는 미투운동(Me too나도 당했다)이 한창이었습니다. 기득권과 남성을 동일시하고 여성은 약자라는 프레임이 형성돼 있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45세 남자와 21세 여자에 관한 이야기는 자연스레 사람들의 상상력을 롤리타컴플렉스 쪽으로 몰아갔고, 패미니스트를 비롯한 많은 여성들에게서 화염과 같은 분노를 일으킨 것입니다. 제작진이 서둘러 두 캐릭터 사이에 로맨스 같은 건 절대 없다는 해명을 했지만 한 번 시작된 의혹의 눈빛은 쉽게 거둬지지 않고, 한 번 박힌 미움의 가시는 쉽게 뽑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드라마의 대중적 비호감에는 제목도 한몫 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아저씨라는 단어에는 결코 우호적이지 않는 이미지가 덧 씌워져 있습니다. 지하철에서 옆 사람은 신경 쓰지 않고 다리를 벌린 채 앉아있는 사람, 젊은 여자를 노골적인 시선으로 쳐다볼 것 같은 사람, 속물적이고 부끄럼 모르는 그런 사람쯤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이런 불쾌한 이미지의 아저씨를 21살의 어린 여자와 매치시킨 것입니다. 여성이라면 가장 싫어할만한 설정인 것이지요.

 

물론 나도 예외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방영당시에는 아예 볼 생각을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난 5월 열린 2019 백상예술대상에서 이 드라마가 TV 드라마부문 작품상과 작가상을 수상하는 것을 보면서 생각을 달리 먹게 됐고, 드라마를 정주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 드라마를 놓쳤다면 손해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지금까지 <나의 아저씨>에 대해서 가졌던 생각은 모두 오해였습니다. 드라마는 로맨스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소통과 공감, 그리고 위로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한 채 거칠고 외로운 삶을 살아온 소녀가 이해심 많고 따뜻한 어른을 만나 인간적인 공감을 이루면서 사람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고 당당한 사회인으로 성장하게 된다는 내용의 이야기로, 지금을 살아가는 20대와 기성기성세대가 처한 녹록치 않은 현실을 충분히 반영하면서도 드라마적 요소를 통해 공감과 판타지를 적당하게 아우른 드라마였습니다.

 

아저씨 박동훈(이선균)은 눈에 띄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는 대기업 부장이긴 하지만 대학 후배가 대표로 있는 회사에서 그냥저냥 살아가는 인물입니다. 변호사인 부인은 바람을 피우고 집이라고 들어와도 따뜻한 밥 한 끼 차려주는 사람 없고, 회사에 나가도 잘나가는 후배의 그늘에 가려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인물입니다. 아마도 박동훈의 모습은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대부분 아저씨들의 모습일 것입니다. 회사에서는 잘나가는 후배에게 치이고, 집에서도 외롭고, 그 빈자리를 조기축구회나 친구들과의 술자리로 채우지만 가슴 속은 허전하기만 합니다. 드라마에서는 박동훈의 처지를 사형선고를 받은 무기수의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지안(이지은)은 이런 박동훈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한 달에 5백에서 6백을 벌면서 왜 저런 얼굴을 하고 살아가는 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부모가 남긴 사채 빚에 시달리는 이지안은 낮에는 회사에서 허드렛일을 하고, 밤이면 뷔페에서 설거지를 하고 늦은 시간 귀가해 쓰러지듯 잠드는 게 일상이지만 그녀가 버는 돈은 모두 사채를 갚는 데 들어가고 뷔페에서 사람들이 먹다 남긴 음식을 싸와서 끼니를 때우는 그녀에게 미래 또한 암담하기만 합니다.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의 요양병원비가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친구도 없고, 찾아오는 사람이라고는 사채 빚을 갚으라고 쫓아다니면서 괴롭히는 이광일(장기용)이 있을 뿐입니다. 믹스커피 두 봉지를 뜯어 마시는데 그것이 유일한 위안일 뿐인 삭막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녀야말로 죽지 못해 사는 처지입니다. 박동훈의 불행이 주관적이라면 이지안의 불행은 객관적 불행입니다.

 

지겹고 우울한 삶을 살던 박동훈이 이지안을 발견했습니다. 외로운 사람이 외로운 사람을 알아보고 우울한 사람이 우울한 사람을 알아본다고,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 이지안의 불행이 박동훈에게는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이지안을 이해했습니다.

 

회사 동료들과의 회식자리에서 동료 중 한 사람이 싸가지 없는 이지안을 자르자고 하자 너희는 걔 안 불쌍하냐? 경직된 인간들은 다 불쌍하다. 살아온 날들을 말해주잖아. 상처받은 아이들은 너무 일찍 커버려. 그게 보여. 그래서 불쌍해. 걔의 지난날을 알기가 겁난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필요성에 의해 이지안을 판단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그녀가 고분고분한 을의 모습을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녀가 껄끄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박동훈은 자신을 배제하고 그녀를 봤습니다. 그러자 그녀의 고단한 삶과 외로움이 보인 것이고 그래서 연민을 가진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자신의 필요에 의해 사람을 판단하고 소모하는데 반해 박동훈은 불쌍한 것을 보면 불쌍한 줄 아는 연민의 마음을 가진 어른이었습니다. 박동훈의 이런 인간성을 알게 된 이지안 또한 조금씩 그에게 마음을 열었습니다. 할머니에게 박동훈의 안부를 전하면서 나랑 친한 사람 중에서도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게 좋아서하면서 울먹입니다. 이지안의 닫혀 있던 마음이 열리고 사람에 대한 신뢰를 회복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박동훈은 이지안에게 세상은 따뜻한 곳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었고, 이지안이 경직된 얼굴을 풀고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준 것입니다.

 

드라마는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애환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알바를 전전하며 살아가지만 미래 같은 건 기대할 수 없는 20대의 애환. 그리고 가정적으로도 위태롭고 사회에서도 곧 도태될 것 같은 40대의 외로움과 불안. 그런데 이 드라마가 어둡지만 않은 것은 이런 암울한 환경에서도 가족을 살뜰하게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이 있고, 역시 가난한 친구들이 있고, 옆에 사람이 있기 때문에 삶이 마냥 어둡게만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드라마는 우리 사회에서 어두운 일면을 보여주면서도 사람 사이의 연대를 통해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대안을 제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