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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지혜의 눈 | 생로병사, 과연 고(苦)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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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19-06-07 15:37 조회1,44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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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로병사, 과연 고()인가?

 

부처님, 고통과 고통의 소멸만을 설하심

고통 대하는 방식 달라지면 가 아니다

 

불교는 맨 날 고통만 말하는 종교인가 하고 불평하는 수가 있다. 불교에 입문해 제일 먼저 접하는 사성제와 팔정도 같은 교리에서도 고통()이 초점이 된다. 또 사법인에서 일체개고라니까 생로병사 모두가 다 고통이요 인생=라는 등식이 마구잡이식으로 도배하기도 한다. 거기에 동의하지 않으면 덜떨어진 범부나 외도로 취급받기 일쑤다.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은 고통과 고통의 소멸만을 말씀하셨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만큼 불교공부에 있어 고통의 인식이 중요함을 보여준다.

그런데 여기서는 고통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소멸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봐야 한다. 고통을 제대로 파악할 때 소멸의 방법을 찾을 수 있고 고통의 완전한 소멸 즉 열반(涅槃)도 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문제는 부처님 가르침을 접하는 이들의 태도였다. 불교가 아름답고 즐거운 측면은 안보고 반대의 부정적인 측면만 강조하는, 그래서 시대에 부합하지 않는 종교가 아니냐 하는 인식 말이다. 고통의 완전한 해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가르침이 막 입문 단계에 있는 이들에게는 부정적인 선입견만 강하게 남겨 줬던 셈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생로병사가 고통이라 가르치셨다. 태어남()은 죽음()의 원인이 되므로 분명히 고통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생도 사도 그 자체가 고통이 아니라 어떤 필연적인 현상일 뿐이며, 그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가 관건이다. 여기서 필연이라는 것과 이를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부처님께서도 생로병사를 숙명처럼 받아들이라 하지 않으셨고 극복하도록 이끌었다.

생로병사를 고통이라 가르칠 때는 막연히 늙지도 않고 병도 안들고 영원히 살기를 바라는 태도를 지적한 측면이 있다. 생로병사를 단순한 수용이나 배격의 대상으로 간주하지 않으면서 품위 있게 살며 품위 있게 늙어 가고 질병과 죽음에도 의연히 대처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단순한 고통이 아니게 된다.

우리는 단순히 생로병사=라는 등식에 매여 있을 게 아니라 그러한 등식을 인지하고는 생로병사라는 새로운 등식으로 만들어 갈수 있어야 한다. 다행히 현대사회에 들어 생로병사에 대한 인식은 차츰 바뀌고 있다. 잘 살아보자는 웰빙부터 잘 떠나자는 웰다잉이 제시되고, 특히 노화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사고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노인정신의학 박사인 마크 아그로닌에 따르면 노화에 대한 시각은 성공적인 노화, 긍정적인 노화, 창조적 노화로 진화돼 왔다고 한다. 성공적인 노화는 질환과 장애를 겪을 위험을 최소화하고 의미 있는 활동에 참여하는 것 등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나 성공적인 노화에 실패할 경우 그 이후 나이 듦에 대해서는 아무런 가치나 의미가 없다고 본다. 이보다 진전된 긍정적인 노화는 노년을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보아 나이가 들며 나타나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적극 대처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러나 위 두 개념은 노화에 어떻게 대처 할 것인가에 초점을 두지 노화 자체가 장점이나 해결책의 근원이 될 수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이에 비해 창조적 노화는 노화 그 자체의 가치를 발견해 낸다. 즉 나이가 들었음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성취하는 것들에 주목한다.

1941년 노년의 화가 마티스는 시름시름 않다가 거의 의식을 잃어 이른바 연령점에 도달했다. 그런 그가 기적적으로 회복해 다시 붓을 잡고 마침내 특유의 화법을 창안해냈다. 친구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조금씩 기운을 얻은 그는 떠들썩한 농담, 시시콜콜한 이야기, 장난이 가득한 편지들 덕분에 정을 느끼고 노년의 병약함이나 외로움, 두려움 따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고 한다.

고통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지면 그것은 단순한 고가 아니게 된다. 금강경식 논리라면 고가 아니라 그 이름이 고가 되는 셈이다. 중요한 점은 고가 행복의 자양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김봉래(BBS불교방송 보도국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