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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에 나타난 민중불교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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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3호 발행인 안종호 발간일 1996-03-18 신문면수 5면 카테고리 고전속의 불교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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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이성수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통리원 사회부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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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3-31 12:19 조회 4,75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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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에 나타난 민중불교 사상
삼국유사는 우리 문화의 보고 욱면의 설화는 민중의 소망을 반영

선승 일연(1206~ 1289)의 (삼국유사)는 삼 국의 역사와 신화, 전설, 민담을 모 아 기록한 책이다. 그는 (삼국유사) 의 저술을 위해서 청년시절부터 자 료를 수집하였고, 70세 후반부터 원 고를 집필하여 (삼국사기)보다 140년 뒤인 고려 충렬왕 7 년(1281)에 완성하였다. 일연은 자 기 생각에 따라서 자료를 해석하지 않았고, 실제로 전하는 설화를 충실 하게 수록하는 한편, 불교 승단의 전 승인 승전과 함께 민간전승인 향전(예혀)에도 상당한 비중을 두었 다. 향전이라고 밝힌 것 가운데는 자 기가 나서서 현지조사를 한 것도 적 지 않았다. 않았다. (삼국유사〉는 유 가적 관점에서 쓰여진 삼국사기와는 달리 불교 수용에 따르는 사상적 변 화의 설화적 표현을 충실하게 받아 들이면서 불교설화와 민간전승이 만 나는 자리에서 역사를 인식하려고 했다. 또한〈삼국유사)는 국가나 정 치권력에 대하여 사회와 서민 생활 을 옹호하려고 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불교를 통하여 양자간의 등 직적인 조화를 역설하고 있다. 이러 한 이유로 삼국유사는 역사적으로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초기의 불교 의 모습을 살피는데에 더없이 귀중 한 자료이다.

다음은 (삼국유사)중의 ‘욱면비염 불서승’설화를 정리 한 것인데 이를 통하여 당시 민중들 의 불교에 대한 모습을 살펴보겠다.

신라 경덕왕 때 강주에 사는 불교 신자 수십 명이 그 고장 변두리에 미타사라는 절을 세우고 서방정토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만일 동안 대법회를 열기로 했다. 이 대법회에는 아간(이란 벼슬을 가진 귀진도 참석했는데 그에게는 욱면이라는 계 집종이 있었다. 욱면은 주인을 모시 고 절에 갈 때마다 마당에 서서 염 불을 따라하며 법회에 참가했다. 그 러나 주인은 계집종이 직분에 맞지 않게 행동한다고 못마땅히 여겨, 곡 식 두 섬을 주면서 하룻밤 동안에 전부 찧으라고 명령했다. 욱면은 어 떻게 하든지 이 일을 다 마치고 절 에 가서 염불을 할 생각으로 열심히 찧어 초저녁에 이미 다 끝내고 절에 갔다. 그렇게까지 무리한 주문을 해 도 일을 다마치고 절에 나와 염불을 하자, 주인은 욱면을 더욱 괴롭혔다.

주인은 욱면의 두 손바닥을 좌우 의 말뚝에다 따로 따로 매서 아예 합장조차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랬는 데도 욱면은 좌우로 묶인 두 손으로 합장하려고 했다. 이 지극한 신앙심 이 부처님을 감동하게 했음인지 하 늘에서 “욱면 낭자는 법당으로 들어 와 염불을 하여라”는 소리가 들렸다.

절의 스님들도 이 소리를 듣고 욱면 을 불러 법당에서 정진하게 했다. 그 러자 얼마후 서쪽 하늘에서 음악소 리가 들려오더니 욱면의 몸이 솟구 쳐 절의 대들보를 뚫고 하늘로 올라 가 서쪽 교외로 날아갔다. 그리고 육 신을 버리고 진신으로 변하더니 연 화대에 앉아 큰 빛을 발하 면서 서서히 사라졌다. 지금도 그 법 당에는 구멍이 뚫어진 곳이 있다고 한다. 이상은 향전의 내용이 다.

승전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욱면은 원래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 낸 관음보살을 따라 정성껏 도를 닦 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파계하여 축 생에 떨어져 부석사의 소가 되었다. 일찍이 소가 불경을 등에 싣 고 가다가 불경의 힘을 입어 귀진의 계집종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 이름 을 욱면이라 하였다. 욱면은 하가산에 갔다가 꿈에 감응해서 마침내 불도를 닦을 마음이 생겼다. 귀진의 집은 미타사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귀진은 언제나 그 절에 가서 염불을 하였는데 계집종도 따라와 뜰에서 염불을 하였다. 욱면은 이와 같이 9년 동안을 염불했는데 을미년 정월 21일에 부처님께 불공을 드리 다가 절의 대들보를 뚫고 하늘로 올 라갔다. 소백산에 이르러 신발 한 짝 을 떨어뜨렸는데, 사람들은 그곳에 보리사를 지었고, 산밑에 이 르러 그 육신을 버렸으므로 그곳에 는 제2 보리사를 지었 다. 또한 미타사 법당에 뚫린 구멍은 폭우나 세찬 눈이 아무리 내려도 새 거나 젖지 않았다고 한다.

이상이 (삼국유사)의 ‘욱면비염불 서승’의 줄거리로서 (삼국유사)에는 이러한 민중불교 사 상이 현실에 용해 된 설화가 많은데 여기에 등장하는 이른바 하층민은 노예로 예속되어 있지 않고, 비속한 삶을 오히려 긍정하고, 부처님의 자 비에 의하여 고난을 극복하려한 것으로서 욱면의 이야기는 그 대표적 인 것이다. 당시 욱면처럼 원통하게 살아가던 사람들은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 많은 사람들의 처지를 대 변하는 욱면의 이야기는 고통스런 삶의 대책을 불교적인 상상에서 상 승하려는 의지로 나타냈다. 욱면과 같이 고통받는 하층민들이 세상을 떨쳐버리고 육신마저 벗어난다면 얼 마나 좋겠는가. 그러자면 부처가 되 어 승천을 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었 을 것이다. 굳센 신심으로 고난을 극 복하고 부처가 된 욱면의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가 엿볼 수 있는 것은 당시의 민중들이 불교를 통하여 구 원받고자 한 소망이 매우 절실했으 며 그러한 소망이 반영되어 나타난 것이 바로 이 ‘욱면비염불서승’ 설화 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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