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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총지종은 ‘불교의 생활화, 생활의 불교화’를 표방하고 자리이타의 대승불교 정신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생활불교 종단입니다.

원정 대성사의 삶과 사상, 종단을 넘어 모두가 기억해야할 뜻 깊은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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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68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2-03-01 신문면수 2면 카테고리 종합 서브카테고리 특별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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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이재형 필자법명 - 필자소속 법보신문 필자호칭 기자 필자정보 -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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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2-03-02 12:28 조회 1,23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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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 대성사의 삶과 사상, 종단을 넘어 모두가 기억해야할 뜻 깊은 자산


<원정대성사 탄신 115주년 특별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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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보살은 결코 관념적인 것이 아니고 생생하게 인생의 고락을 겪으면서 고난을 통해 마땅히 수행할 수 있는 사람만이 걸을 수 있는 길이다. 보리심을 통달하고 보리심을 지키며 금강심을 이루고 그 금강심을 키워 불신원만(佛身圓滿)의 단계를 모두 수행하여 온전히 부처가 되리라는 물러서지 않는 각오로 정진해야 할 것이다.”

난세에는 영웅이 탄생하고 의인이 출현한다. 불교총지종을 창종한 원정(苑淨) 대성사(1907~1980)가 그렇다. 원정 대정사는 진각종을 창종한 회당 대종사와 더불어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크게 번창했지만 조선시대 이후 맥이 끊긴 밀교의 중흥을 이끌어낸 주역이다. 또한 대승불교, 생활불교, 실천불교, 재가불교의 기틀을 다진 인물이다.

‘불공 잘해라’는 불교총지종이 올해 창종 50주년을 맞아 원정 대성사의 생애와 가르침을 담은 일대기다. 집필은 동국대 인도철학과를 졸업하고 KBS구성작가, 불교TV프로듀서, 경향신문 객원기자 등을 역임한 김천 프로덕션 맥스웹 대표가 맡았다. 이 책으로 인해 격동의 세월을 살아가며 지식인으로, 수행자로, 불교개혁자로, 불교지도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줬던 원정 대성사의 중생구제 정신과 수행법, 지향점 등도 만날 수 있게 됐다.

1907년 1월 밀양 손 씨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대성사의 생애는 파란만장했다. 6살 때 독립운동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밀양에서 만주까지 걸어 망명길에 올라 혹독한 고초를 겪고, 6·25한국전쟁 때에는 전쟁 포로가 된 외아들을 잃을 위급한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마음을 붙들어준 것은 부처님 가르침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경전공부와 수행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칭명염불로 깊은 경지에 이르기도 했다. 그러면서 불교가 산중이 아닌 삶의 현장에서 힘겨워하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이 돼야 한다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

책에는 이 무렵 대성사에게 일생의 선지식으로 다가온 회당 대종사와의 만남이 소개돼 있다. 회당 대종사와의 만남으로 그는 밀교수행에 뜻을 세웠다. ‘생활 속에서 수행하고 수행이 생활이 되는 길’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회당대종사는 밀교 교법을 펼쳐 종단을 일으키자며 자신은 바깥일을 도모할 테니 교리와 수행체계, 교단을 정비하는 일을 맡아달라고 당부했다.

밀교의 중흥을 위해선 교리체계, 의식과 의궤, 수행체계를 정립해 정통밀교를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시대에 맞는 밀교 신행의 체계를 확립하는 일이 절실했다. 대성사는 팔만대장경을 뒤져가며 밀교경전들을 찾아 번역하고 그 정수를 뽑아 체계화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깨달음과 수행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다. 현실과 생활 속에서 진실하게 생각하고 진실된 말을 하고 진실한 행을 하여 삼밀을 이루면 법계와 행자가 평등한 현실을 깨닫게 되고 법신여래의 삼밀이 행자의 삼밀과도 같아져 결국 즉신성불을 이루게 됨을 깨달았다.

대성사는 밀교의 가르침을 시대 변화와 대중 요구에 맞춰 새롭게 정립해나갔다. 현대 한국 밀교를 개척하고 중흥시키는 일이기도 했다. 그런 지난한 과정을 거쳐 세간과 출세간, 생활과 불교, 남녀노소, 승가와 재가의 구분 없이 기도와 생활이 하나 되어 성불과 해탈을 향해 나아가는 생활불교 종단을 창종하기에 이르렀다. 대성사는 대중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진리를 사상적으로 사유하여 이해하고 배워 닦는 데만 그쳐선 안 된다. 그 진리를 오로지 자기 생명으로 행동하고 실천하는 전인적인 체현에 도달해야 한다.”

종단이 자리를 잡고 전국에서 밀교 수행이 활기를 찾아갔다. 대성사는 창종 이후 한국 현대밀교 사상 처음으로 삼매야계단과 금강계단을 열어 관정식을 베풀고 정통밀교를 전수할 아사리를 배출했다. 교세는 불꽃처럼 일어나 30여 개의 사원이 속속 개설되고 행정기관인 통리원과 연구기관인 법장원이 신설됐다. 교도들의 참여와 신행활동을 돕기 위해 신정회가 결성됐고, 각종 교전이 편찬됐다. 이 한가운데 대성사가 있었다. 만년에 이르기까지 항상 총본산 1층에 앉아 손에는 염주를 들고 입으로는 진언을 외웠다. 누구든 찾아와 법에 대한 물음이나 개인 고민도 털어놓았고, 그에게서 답을 찾고 위로를 얻었다. 1980년 9월8일, 대성사는 “불공 잘해라”라는 짧지만 강한 마지막 법문을 남기고 열반적정의 세계에 들었다.

기억은 자신의 동질성을 지켜주는 힘이고 기억의 축적은 역사를 이룬다. 그러나 저자의 말처럼 우리는 때때로 기억해야 할 것을 잊고 부질없는 것을 기억한다. 파편처럼 흩어진 기억과 자료를 찾고 되살려낸 원정 대성사의 삶과 사상은 특정 종단을 넘어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할 뜻깊은 자산이다.


법보신문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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